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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May 12. 2020

핑크퐁, 너 없이도 잘 해낼 줄 알았는데...

너는 나의 구원자가 되어버렸어.


“엄마, 오늘 우리 아침에 뭐 봤어?”

“아니, 오늘은 영상 아무것도 안 봤지. 아침에 고모집에 간다고 아침만 먹고 바로 나갔잖아.”

“그럼 뭐 하나 봐도 돼?”

“그래~ 뭐가 보고 싶은데?”

“공룡 동요 볼래!”

“자, 그럼 우리 다 같이 리모컨 찾아볼까?”     


평화가 왔다. 30분이면 끝날 평화이지만, 그래도 평화롭다. 두 아이는 싸우지 않고, “엄마, 놀자”며 내 다리에 매달리지도 않고 얌전히 소파에 앉아, 때론 음악에 맞춰 소파에 발을 구르며 텔레비전에서 재생되는 핑크퐁 동요 영상을 본다. 나는 아이들 곁에 앉아 동요를 따라 부르며 얼음이 다 녹아버려 밍밍해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천천히 마신다.    

  



첫 아이를 임신하고 읽은 모든 육아서에서 강조한 것이 영상매체에 너무 빨리 노출시키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아이를 낳기 전이니 그게 뭐 어려운 일인가 싶었다. 그리고 일찍 노출시켜 좋을 것이 없다는 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만한 것이었으므로 신랑과 둘이서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합의를 했었다. 아이들이 두 돌이 되기 전까지는 가능한 한 텔레비전을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말이다.


사랑이를 낳고 난 후, 사랑이에게 텔레비전을 보여주지 않으려니 자연스럽게 우리들도 텔레비전을 보지 않게 되었다. 아이가 일어나는 시간에 눈을 뜨고 아이가 잠드는 시간에 잠을 자다 보니 텔레비전을 볼 시간적 여유도 없었지만, 그렇게 하루 이틀 또 한 달 두 달이 쌓이니 볼만한 프로그램도 없었다. 그렇게 우리도 텔레비전과 조금씩 멀어졌다. 엄마 아빠가 텔레비전을 보지 않으니 아이도 텔레비전이 뭐하는 물건인지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부부는 처음 다짐대로 아이를 영상매체에 노출시키지 않고 잘 키우고 있다고 자부하며 사랑이를 키웠다. 고작 7개월까지였지만.

  

위기 상황은 의외의 곳에서 왔다. 사랑이는 돌 직후까지 카시트에 앉기를 격렬하게 거부했다. 도저히 출발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겨우 출발을 하더라도 10분을 채 넘기기 어려웠다. 첫 아이이다 보니 6개월쯤까지는 차를 타는 장거리 외출을 할 일이 거의 없었는데, 사랑이가 7개월쯤 되었을 때 동생이 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곳에서 결혼식을 하게 되면서 첫 장거리 외출을 하게 되었다. 이미 그전에 카시트에 태웠다가 엄청나게 저항을 했던 경험이 여러 번 있어서 우리 부부는 과연 거기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다. 하지만 대중교통으로 가기에는 너무 먼 곳이라 어쩔 수 없이 사랑이를 차에 태웠다. 역시나 사랑이는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울기 시작했고, 이미 고속도로에 오른 우리는 넘어가도록 우는 아이를 토닥이며 가져간 여러 장난감과 간식으로 아이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다. 하지만 한 번 울기 시작한 아이는 결코 진정이 되지 않았다.

결국 사랑이에게 그전까지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던, 핑크퐁 동요 영상을 유튜브로 보여주었다. 웬일? 방금까지 자지러지던 아이가, 그렇게 눈도 안 뜨고 울던 아이가 슬며시 눈을 뜨더니 점점 눈물을 그치고는 핑크퐁 동요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그 유명한 ‘상어 가족’을 처음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보았다. 그렇게 진정이 된 아이는 동요 영상을 한참 보다가 잠이 들었고, 나는 황급히 유튜브를 껐다. 아이가 진정이 된 것은 다행스러웠지만, 나는 왠지 조금 무서웠다. 그 영상이 뭐라고, 그렇게 넘어가던 아이가 울음을 뚝 그치니, 좋기보다는 영상을 보여주는 것이 왜 아이들의 뇌 발달에 좋지 않은지 조금은 실감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이의 뇌 회로를 뚝 멈춰버리는 것 같은 그 선명한 느낌이 두려웠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사랑이도 너무 피곤했던지 내내 조용히 잠만 잤다. 그 뒤로 한동안 어떤 방식으로도 영상매체를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여행은 고사하고 20분을 넘는 거리의 외출조차 거의 포기했다. 꼭 가야 하는 곳이면 가능한 한 아이의 낮잠 시간을 맞춰서 갔고, 그렇지 않은 곳이면 가지 않은 쪽을 선택했다. (물론 그것이 영상을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카시트에 앉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기 때문이긴 했다.)


그런데 아이가 돌이 지나자 또 얘기가 달라졌다. 2족 보행이 가능해지고 어디든 올라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데다가 심각한 엄마 껌딱지였던 사랑이 덕분에 잠깐도 짬을 내기가 어려웠다. 청소며 설거지며 집안일은 둘째 치고, 아이를 잠깐 두고 화장실을 가는 것도 불안했고, 밥을 챙겨 먹는 것 역시 거의 불가능했다. 신랑이 퇴근한 후에는 서로 돌아가며 밥도 먹고 집안일도 분담했지만, 혼자서 아이를 봐야 하는 시간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와 신랑은 현실과 타협했다. 한 번에 20분을 넘지 않는 선에서 하루 한 번 아이에게 텔레비전을 보여주는 것으로 말이다. ‘아이들 나라’라는 채널을 신청해서 그 채널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중 뽀로로 만화나 핑크퐁 동요, 가끔은 동화구연 등을 보여주었다. 그 20분의 평화가 얼마나 귀한지……. 나는 그 20분 동안 밥을 먹고 설거지거리를 식기세척기에 넣고 양치까지 하는, 거의 축지법을 쓰는 수준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할 일을 끝내고 나면 마법처럼 20분의 평화는 끝이 나고 “엄마, 엄마, 놀자, 놀자” 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고요한 집안에 울려 퍼졌다.

           

그러다 둘째 봄이가 태어났고, 봄이는 사랑이 덕분에 허리에 힘을 주고 앉기 시작하자마자 뽀로로와 핑크퐁을 알게 되었다. 봄이는 돌이 되기도 전에 핑크퐁 동요 중에서 좋아하는 동요가 이미 생겼고, 그 영상에 나오는 동작도 어설프게 따라 할 정도가 되었다. 두 아이 모두 아침형 인간이라 6시면 기상을 하는 터라, 오전 시간이 매우 길어서 아침밥을 먹고 양치를 하고 난 뒤를 영상 보는 시간으로 정해두었다. 16개월 봄이는 벌써 그것을 알고는 첫째가 양치를 하고 나오면 제가 먼저 소파로 쫓아가서 리모컨을 들고 앉아 나더러 핑크퐁 동요 중 ‘거미’를 틀어달라고 그 작은 손을 꼼지락거리며 율동을 흉내 내고 있다. 오빠를 꼭 닮아 역시나 카시트 타기를 격렬하게 거부하는 봄이를 카시트에 앉히는 데에도 핑크퐁만 한 것이 없다. 카시트에 앉으면 곧장 손가락으로 앞좌석의 머리받이를 가리키며 "크아" 공룡 소리를 내면서 얼른 핑크퐁 공룡 동요를 틀어내라고 성화다. 첫째 때는 외출을 포기했는데, 둘째 때는 두 돌 이전까지 적어도 휴대전화 영상은 보여주지 않겠다던 다짐을 포기하게 된다.          




코로나 사태로 사랑이가 등원을 하지 않고 집에 하루 종일 있기 시작하면서 하루 30분이었던  텔레비전 시청 시간이 1시간으로 늘어났다. 어느 날 사자 피규어를 들고 놀다가, 사자 나오는 것을 보고 싶다고 하길래 라이언킹 앞부분을 좀 자르고 1시간쯤 보여줬는데 신세계를 맛봤는지 그 뒤로는 계속해서 영화를 보여달라고 해서 1시간 정도로 영상 시청 시간을 늘렸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내가 너무 힘들어서 나 자신과 타협하고는 시청 시간을 늘린 것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사랑이가 영상을 볼 수 있는 시간이 언제인지, 어느 정도 볼 수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고 그것에 잘 따라준다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둘째 봄이는 자연스럽게 오빠를 따라 볼 때 보고 끌 때는 꺼야 된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 같다.      

그렇게 하루 30분~1시간 정도, 핑크퐁 공룡 동요, 자동차 동요와 함께 가정의 평화가 온다. (가끔 사랑이의 요구로 다른 것들을 보기도 하지만, 봄이까지 춤을 춰가며 신나게 보는 것은 핑크퐁이 유일하다.) 이제는 그 시간이 좀 길어진 덕에 축지법을 쓰지 않고도 조금 여유롭게 집을 치우고 밥도 먹고 아이스 아메리카노까지 마신다. 그리고 아이들 곁에서 같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신나게 논다. 아이들이 깨어 있는 동안 내게 허락된 유일한 휴식 시간인 그 시간이, 가끔은 너무 빨리 가서 아쉬울 지경이다.

요즘 들어 아주 가끔이지만, 핑크퐁 보는 것보다 엄마랑 노는 게 더 좋다며 아무것도 안 보고 엄마랑 놀겠다고 말하는 사랑이에게 겉으로는 그럼 보지 말고 엄마랑 놀자고 말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제발 30분만 엄마랑 같이 보면 안 될까?’라고 눈물로 묻는다. 함께 있는 24시간 중에 자는 12시간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엄마랑 노는 것이 제일 재미있다는 두 엄마 껌딱지를 키우며 제발 핑크퐁이라도 좀 보면 안 되겠냐고 사정하고 싶을 때도 있다.        

  


아, 핑크퐁 너는 나의 구원자였는데, 요즘은 종종 구원에 실패하는구나. 너 좀 분발해야겠다. 그래야 나도 숨 좀 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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