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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May 21. 2020

그날의 엄마를 위로하고 싶은 밤

신랑과 함께 두 아이를 데리고 집 앞 놀이터에 나갔다. 그 놀이터에는 제법 높은 미끄럼틀이 있는데, 두 아이 모두 그 미끄럼틀을 타겠다고 성화를 부렸다. 평소에 그 미끄럼틀은 유난히도 위험하게 보여 어떻게든 안 태우던 것이었다. 신랑은 자기가 함께 타면 괜찮다며 두 아이를 데리고 함께 미끄럼틀 꼭대기로 올라갔다. 사랑이는 몰라도 16개월 이가 타기에는 너무 높은 미끄럼틀이라 가능한 한 말리고 싶었다. 그런데 두 아이가 너무 신이 난 데다, 두 번까지는 잘 타고 놀길래 나도 조금 방심하던 차였다.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온 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 우는 소리가 너무나 높은 소리라서, 분명히 어딘가 다친 것 같긴 한데 특별히 눈에 보이는 외상이 없었다. 신랑도 갑자기 이가 우니 당황하긴 했지만, 도무지 왜 우는지 알 수가 없다며 아이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하지만 이내 울음을 그치기에 잠시 어디가 쓸렸나 보다 싶어서 아이를 내려놓았다. 그런데 이가 한 걸음 가고 픽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나’ 싶어서 다시 일으켜 세웠더니 또 한 걸음 가서 픽 주저앉고, 또 일어나더니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여보!!! 이 다리가 이상해.”

“어??”

“애가 못 걷는다고!!! 계속 주저앉아!!”

“뭐라고?”


별일 아니라 생각하고 벤치에 앉으려던 신랑은 내 말에 벌떡 일어나 우리에게로 뛰어 왔다. 안고 있던 이를 다시 바닥에 내리니 역시나 한 걸음 가고 절뚝 하며 주저앉아버렸다. 사색이 된 신랑은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양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어떤 일에도 당황하는 경우가 없는 신랑도 이의 걸음을 보고는 놀랄 대로 놀란 듯했다.


“빨리 병원부터 가자.”

“어느 병원 가야 하지?”

“일단 바로 앞에 소아과니까 가서 보이자.”


나는 이를, 신랑은 사랑이를 안고 미친 듯이 뛰어 병원으로 갔다. 의사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이를 걸어보게 했더니 좀 전처럼 주저앉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한쪽 다리를 절면서 걸었다. 우리 눈에는 너무 심하게 저는 것처럼 보였는데, 의사는 웃으며 얘기했다.


“조금 저는 것처럼 보이긴 하는데, 애들은 아프면 웁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걷는 걸로 봐서 근육이 놀라거나 그런 것 같긴 한데, 그래도 확인을 하는 게 좋으실 테니 정형외과로 가보세요.”


‘아니, 지금 애가 이렇게 절뚝거리는데 웃으면서 얘기가 나와? 대체 공감 능력이라고는 1도 없는 사람이구나!’


속엣말로 의사를 원망하며 근처 정형외과로 갔다. 정형외과 의사는 이의 걷는 모습을 보더니 확실히 절뚝거린다며 엑스레이를 찍어보자고 했다. 너무나 작은 아이를 차갑고 딱딱한 엑스레이 촬영용 침상에 눕혔다. 나와 신랑은 우는 이를 양쪽으로 잡았다. 이는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다행히 큰 저항 없이 엑스레이 촬영을 마쳤다.


“뼈에는 이상이 없네요. 깨끗합니다.”

“그럼 왜 절뚝거릴까요?”

“아마 근육이 놀랐을 수도 있고, 순간 접질리면서 그 기억이 남아 있어서 그럴 수도 있어요. 혹시나 뼈가 부러졌다고 해도 아이들은 금방 붙기 때문에 별걱정 안 하셔도 되는데, 그럼 아파서 애들이 많이 웁니다. 그런데 얘를 보니 그렇게 아픈 아이 같지 않아요.”

“네, 아까도 그렇게 많이 울지는 않았어요.”

“일시적인 현상일 수 있으니 한 이틀간은 너무 많이 걷게 하지 마시고 지켜보세요.”

“만약에 절뚝거리는 게 3~4일 더 지속되면 어떻게 하죠?”

“그럼 다시 데리고 오세요.”


의사는 나의 질문이 전혀 가능성 없는 말이라는 듯 웃으며 얘기했다. 그래도 엑스레이상으로 별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여서인지, 앞서 소아과 의사의 웃음과는 달리, 안도감이 들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난 이는 다행히도 언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잘 걷고, 잘 뛰고, 잘 놀았다. 하지만 신랑은 이가 절뚝거리던 모습이 굉장히 충격적으로 뇌리에 박혔는지 평소와 달리 아이가 조금만 위험해 보여도 어쩔 줄 몰라하며 아이의 행동을 저지했다. 아마 그 몇 시간이 신랑에게는 몇 년처럼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아이들이 잠들고 나면 그 시간 내내 죄책감에 시달리며 괴로웠을 신랑을 안아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종일 넋을 놓고 있던 신랑은 아이들을 재우면서 같이 잠이 들어버렸다.




오늘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일종의 해프닝이었지만, 정말로 아이가 부모의 부주의로 인해 다쳐서 상처를 입게 되었을 때 부모가 겪는 심리적인 고통은 실로 엄청날 것이다. 부모가 되어 보니 아이가 뛰다가 넘어져 무릎만 조금 깨어져도, 종이에 손끝이 살짝 베여 피가 나도 그렇게 마음이 쓰리고 아플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런 사고를 내가 막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그 쓰린 마음은 몇 배가 되어 아이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나를 괴롭혔다. 그런데 그 상처가 어떤 형태로든 평생 남는 것이라면, 그 부모의 마음은 어떨지 부모가 되었어도 다 짐작하기가 어렵다.




내게는 너무나 예쁘고 착한 여동생이 있다. 그런 동생의 오른쪽 손등에서 손목까지에는 한눈에 봐도 큰 사고가 있었음을 직감할 수 있는 화상 흉터가 있다. 나보다 세 살이 어린 동생은 돌도 되기 전 그런 화상을 입었다.


그 무렵 엄마, 나, 여동생은 곰팡이가 가득 핀 단칸방에 살았다. 혼자였던 엄마는 너무도 작았던 동생을 알뜰히 보살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그래도 동생은 병치레 한번 없이 잘 자랐다. 엄마의 말을 빌리자면 예민하고 자주 아팠던 나와 달리 동생은 정말 주는 대로 잘 먹고 잘 자는, 너무나 순한 아기였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동생의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에 돌아보니, 커피포트에 있던 뜨거운 물이 동생의 손등을 덮치고 있었다고 한다. 기어 다니던 동생이 바닥에서 끓고 있던 커피포트의 선을 당겼고 그 뜨거운 물이 그대로 동생 손등으로 쏟아진 것이었다. 커피포트를 바닥에 놓고 끓이면서도 그 위험을 생각하지 못할 만큼 엄마도 그저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고 있던 시절이었다.

엄마는 정신없이 동생을 안고 큰 병원으로 갔고, 빨리 치료를 한다고 했지만 너무나 뜨거운 물이었던 탓에 동생 손에는 큰 흉터가 남게 되었다. 엄마는 그 일 이후로 정신이 번쩍 들며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 뒤로 엄마는 참 치열하게도 우리를 키웠다. 그것도 아주 잘 키워냈다.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의 작은 상처에도 가슴 아픈 순간들을 겪으며, 커피포트의 물이 동생의 손을 덮치던 그때, 엄마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싶은 생각이 자주 들었다. 그 시절 혼자서 젖먹어린애를 업고 네 살 난 딸의 손을 잡고는, 몇 정거장 떨어진 곳에 있던 병원까지 버스를 타고 오가던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지…. 엄마는 동생의 상처를 볼 때마다, 그것이 흉터로 자리 잡아가는 내내 자신의 마음속에 더 큰 흉터를 아로새겼을 것이다. 아이를 잘 돌보지 못했다는, 아이가 자신 때문에 다쳤다는 그 죄책감은 오래도록 엄마를 괴롭혔을 것이다. 


아주 감사하게도 동생은 커가는 내내 단 한 번도 그 흉터를 보며 엄마를 원망하지 않았다. 일부러 흉터를 가리려고도 하지 않았고, 그 흉터 뒤에 숨어 살지도 않았다. 그렇게 구김살 없이 아주 예쁘고 사랑스러운 어른으로 잘 자랐다.




오늘 밤은 꿈에서 그때, 겨우 스물일곱 살이었던 우리 엄마를 꼭 만나고 싶다. 동생의 상처가 아물어 흉터가 된 이후에도, 여전히 그날을 스치기만 해도 아픈 생생한 상처로 기억할 엄마에게 꼭 이 말을 해주고 싶다.



엄마, 엄마 탓이 아니야. 절대로 엄마의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 이제 그만 그 상처를 훌훌 털어버려요.

그렇게 오래전 그 날, 남모르게 울며 잠들었을 수많은 엄마의 밤을 토닥토닥 다독여 위로해주고 싶은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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