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밀라노
작가님, 무탈한 날들 보내고 있으신가요. 저는 지난번 편지 끝자락에 말씀드린 대로 두 아이의 방학과 동시에 엄마 개학이 시작되었습니다. 날짜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지나가고 있어요. 예상했던 대로, 사실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빨리 일상의 패턴은 와르르 무너졌답니다. 아이들 방학이 겨우 5일쯤 되었는데, 이전까지 제가 어떤 패턴으로 살아왔었는지 아득할 정도네요.
시 필사를 하지 못한 지도 5일쯤, 새 책을 집어 들지 못한 지도 5일쯤, 글을 쓰지 못한 지도 5일쯤 되었어요. 아이들의 방학과 동시에 꾸준하게 지켜오던 '나의 루틴'이 완벽히 사라졌달까요. 그래도 각오했던(?) 일이라 그런지, 생각보다는 잘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직 5일 차라 그럴지도요.) 아, 잘 받아들인다고 해서 아이들과 하하 호호 즐거운 매일을 보내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뭐, 예상하시겠지만 부끄럽게도 매일 화내고 반성하기를 반복하는 날들입니다.
이번에 작가님이 보내주신 편지의 화두는 '전문성'이더군요. 저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꽤 있어요. 작가님은 언제나 저를 '전문가'라고 생각해 주셨지요. 교사라는 직업은 분명 '전문직'에 속하니, 적어도 제가 공부했고 가르치는 '국어'라는 교과목에 대해서만큼은 전문가임이 분명할 겁니다. 그런데 저는 ‘내가 전문가인가’라는 자문에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직업 자체가 주는 전문가적 이미지는 분명히 있습니다. 국어 문법이나, 교과서에 주로 나오는 문학 작품 등에 대한 기본 지식도 다른 분들에 비해 조금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교사는 문법이나 문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는 직업이 아니라, 그것을 학생들에게 잘 가르치고 학생들의 생활을 잘 지도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직업입니다. 그래서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잘 전달하는 것이 교사의 전문성을 더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저는 현장에 있을 때 항상 '나는 전문성이 부족하다'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내가 아는 것을 아이들이 삶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르치고 싶은 욕심. 그 욕심 때문에 밤잠을 줄여가며 수업을 준비했었습니다. 물론 100을 준비해도 실제 수업에서는 50도 전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어요. 어떤 학생이냐에 따라서는 50은커녕 1도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지요. 그럴 때 느낀 좌절감이란,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좌절감이 쌓이다 보면 제가 하는 일에 대한 회의가 들기도 했고요.
일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어떤 일에 일만 시간쯤 투자하면 그 일의 전문가가 된다는 법칙입니다.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면, 매일 3시간씩 투자한다고 할 때 약 10년 정도면 그 분야에서 전문가가 된다는 말입니다. 저는 교사가 된 이래로 매일 평균 최소 4시간 이상의 수업과 2시간 이상의 수업 준비를 했으므로, 하루 최소 6시간 이상은 수업에 골몰한 셈입니다. 교직에 들어온 지 올해로 14년이 되었지만, 길고 길었던 육아휴직 기간을 제외하니 실제 근무 경력이 9년쯤 되네요. 매일 6시간씩 9년이라면, 일만 시간은커녕 그 두 배는 수업에 몰두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수업은 너무나 어렵고, 언제나 아득하기만 합니다.
우리가 만나 함께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벌써 4년째인 것을 알고 있으신가요? 저희가 처음 줌(Zoom)에서 만났던 것이 2021년 여름이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4년 동안 지켜본 작가님은, 작가님 말씀처럼 참 꾸준한 분이셨어요. 꾸준히 자기 글을 쓰고, 슬로리딩 모임을 운영하며 좋은 책을 읽고, 짧은 글쓰기 모임을 운영하며 글쓰기에 입문하는 분들을 이끄셨어요. 새 원고를 쓰고, 묵힌 원고를 책으로 만들고, 틈틈이 책 쓰기와 글쓰기 강의를 하고, 다른 분들의 글을 편집해서 출간을 돕고. 그 모든 일을 타국에서 오직 혼자 힘으로 해내시는 것을 보면서 저는 작가님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어요.
제가 관찰한 것은 4년이었지만 작가님의 글쓰기는 이미 한참 전부터였으니, 작가님의 일만 시간은 이미 꽉 채워지고도 남은 셈입니다. 일만 시간의 법칙에 따르면 작가님도 이미 충분한 '전문성'을 지니셨다고 감히 확언해 봅니다. 그러나 작가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겠지요? 제가 수업 앞에서 여전히 전문성이 부족하다 느끼는 것처럼요.
스스로를 믿지 못할 때, 곁의 사람을 믿어보는 게 힘이 될 때가 있더라고요. 작가님과 저는 모두 일만 시간의 법칙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한 분야에서 오랜 노력을 기울여왔지만, 스스로의 전문성에 대해서는 물음표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작가님 눈에는 제가, 제 눈에는 작가님이 충분한 전문가로 보여요. 자신을 100퍼센트 믿기 어려울 때, 우리 서로를 믿어보면 어떨까요. 저는 작가님을, 작가님은 저를 믿으며 스스로에게 조금은 관대해져 보는 겁니다.
얼마 전에 읽은 소설 ‘어느 날의 나(이주란)’라는 소설의 마지막에 이런 문장이 나와요.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자고, 그게 사는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자주 쓰거나 대단한 미래를 꿈꾸며 살지는 않지만 내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은 어차피 바꿀 수 없고 오늘 나는 그 어느 날의 나보다 괜찮으니까. 가진 것을 생각하면. (113쪽)
이 문장이 굉장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밥을 잘 먹고 잠을 잘 자’는 것이야말로 ‘사는 것’이지요. 작가님이 요즘도 작가로서의 전문성을 깊이 고민하며 잘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날들을 보내면서도, 폭염을 뚫고 걷기를 멈추지 않고 일상의 패턴을 꽤 만족스럽게 유지하고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잘 사는 것’이 아닐까요. 뭐 대단한 미래를 꿈꾸지 않지만, ‘오늘의 나’를 그대로 인정하고 긍정하며 사는 삶은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매일을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고요.
우리 마음에 쏙 들지 않는 우리, 끝없이 실수하고 실패하는 우리, 완성되지 않고 완벽할 수 없는 우리, 오늘의 우리가 그런 우리일지라도, 과거의 우리와 비교하면 이미 꽤 많은 것을 가졌다고 믿어봐요. 고백하자면 이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요즘 들어 스스로가 다시 미워지려는 찰나라, 계속 스스로에게 주문을 거는 중이랍니다. 작가님께도 같은 주문을 걸어드릴게요.
저보다 먼저 아이들의 방학을 맞이하신 작가님의 일상이 궁금합니다. ‘엄마의 일탈’을 보여주겠다고 하셨는데, 일탈에 성공하셨는지요. 저는 아마 당분간 ‘일탈’이라는 단어를 액자 속 그림처럼 놓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렴 어떤가요. 제게는 누구보다 좋은 글 친구, 선량 작가님이 계신 걸요.
사랑을 담아.
From. 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