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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량 Jul 22. 2024

책을 읽지 않는 날, 글을 쓰지 않는 밤

편지할게요!

To. 대구


작가님은 오늘도 새로운 책을 읽고 계시겠지요. 그리고 밤이 되면 시를 필사하시고, 또 시간이 남으면 글을 쓰고 계시겠죠. 작가님의 하루 패턴을 떠올릴 때쯤에 어김없이 브런치에서 알람이 떴어요. "진아 작가님의 새 글이 발행" 되었다고요. 작가님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꾸준한 사람입니다.


작가님께서 남겨주신 책의 문장을 곱씹으며 저는 안도했어요. 특별할 것 없이 반복되는 하루가 저는 꽤나 괜찮게 느껴졌는데요, 내가 너무 현재에 안주하며 사는 것은 아닌지 살짝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sns에 들어가 보면 성공을 위해 정말 열심히 사는 사람들과 마주합니다. 릴스나 숏폼으로 수익을 얻는 사람들도 요즘 꽤 많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조금 더 열심히 영상을 만들어야 하나.... 조금 더 돈을 벌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야 하나.... 고민에 빠지곤 해요. 하지만 곧 보잘것없는 제 영상 조회수를 보고 현실을 직시합니다.

'아.... 나는 이런 부와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구나....'

그리곤 다시 운동화를 고쳐 신고 공원을 열심히 걸으며 제 일상의 패턴에 발자국을 남깁니다. 저는 곧 만족감에 젖어들며 편안함을 느꼈어요. 저만 그런 게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저도 참 꾸준한 사람 중의 한 명인 데요, 요즘은 그 꾸준함을  놓아버렸어요. 욕망과 욕심을 내려놓았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을 해보고 있어요.

작가가 되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조금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어서 책을 무작정 읽기 시작했어요. 정말 감사하게도 책을 내어 작가가 되었고, 오랜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누군가의 글을 봐주고, 책을 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으로 살고 있어요. "꾸준히 글을 쓰면 뭐라도 되어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는데 정말 뭐라도 하는 사람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그 꿈을 이룬 지금, 저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기분이에요.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그런 기분입니다.


얼마 전에 어느 출판사 대표님이 쓰신 스레드 글을 보았어요. 그 대표님은 "특정 분야에 전문성이 있는 사람"의 글을 선호한다고 하시더라고요. 하루에도 여러 개의 투고 원고가 오는데 그중에 관심이 가는 원고는 전문적인 글이라고 하셨지요. 글을 제대로 써보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전문성이 있고, 출판사의 기획대로 글을 쓸 마음이 있다면 출간계약을 하신다고요.

매우 짧은 글이었지만, 저는 꽤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저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전문성"이거든요.


저는 간호사였지만, 병원에서 일한 것은 고작 5년뿐입니다.

해외에서 10년 넘게 살고 있지만, 방글라데시와 인도 그리고 이곳 이탈리아까지. 어느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했으니 한 나라의 전문가도 아닙니다.

글을 쓰고 있긴 하지만, 전문적으로 배운 것은 아닙니다.

책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 또한 출판사는 아니라서 전문가라고 할 수 없지요.

제가 내세울 수 있는 '전문성'은 과연 뭘까요? 겨우 두 아이를 해외에서 키우며 살고 있다는 것 하나인데 아이들이 특별하게 공부를 잘하지도 않아요. 이쯤 되니 저는 '전문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결론에 다달았어요.

그동안 여러 편의 글을 써서 투고했을 때 왜 그렇게 까이고 까였는지 조금 알 것 같았어요. 전문성은 없더라도 글이 수려하다면, 글은 수려하지 않더라도 내가 인플루언서였다면, 그나마 관심을 가졌을 텐데.....

이 사실을 인정하자 글이 정말 안 써지더군요. 제가 쓴 글이 너무 하찮게 느껴지고 말았답니다.


제가 작가님을 부러워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작가님은 전문성과 경험을 두루 갖추고 계시니까요. 게다가 아이들을 키우며 아이들의 말과 행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글로 승화시키시니까요.


전 작가이기 전에 “경력단절이 오래된 주부”라는 타이틀이 더 강한 사람입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글을 쓸 수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한 저는 한계를 느끼곤 했어요.



작가님과 이렇게 편지를 주고받기 시작하면서 저는 다시 글을 쓸 수 있었어요 오랫동안 멈춰있던 밀라노 매거진을 다시 시작해서 발행했어요. 오랫동안 창작하지 못했던 단편소설도 다시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작가님과 함께 쓰는 이 편지가 제가 다시 글을 쓸 수 있는 마중물이 되어준 것 같아요.



고백하자면, 최근에 저는 책도 잘 읽지 못했어요. 밀리의 서재에 읽고 싶은 책을 잔뜩 담아놓고는 손도 대지 않은 책이 수두룩 합니다. 한국에서 비싸게 해외배송으로 받은 책도 거의 읽지 못했어요. 책을 펼쳤다 하면 잡생각이 들고, 해야 할 집안일이 떠오르거나 졸려서 10분 넘기지 못했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이렇게 책을 안 읽어도 되는지.... 제 자신이 한심하기까지 했어요. 한동안 인문학, 철학, 역사, 고전 같은 책을 읽어야 지식이 쌓이고 글을 쓸 때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하며 그런 책만 찾아 읽었습니다. 에세이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오랫동안 책을 읽지 못하다가 집어든 책은 다름 아닌 에세이였어요. 그것도 내용이 너무 가벼워 좋아하지 않았던 어느 유명 번역가 님의 에세이였어요. 그 책을 읽으며 제가 얼마나 오만했는지 깨달았어요. 저는 도대체 책을 뭐라고 생각한 것일까요? 왜 저는 책의 경중을 따지며 책의 가치에 별점을 매기고 있었을까요?

가벼운 책은 가벼운 데로, 무거운 책은 무거운 데로 결이 맞는 독자에게 가 닿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오늘, 꽤 놀라운 일이 하나 있었어요. 오늘은 주일이라서 교회에 갔는데요, 아이들과 예배당에 들어갔는데 처음 본 여자분이 저에게 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어요.

"혹시, 선량 작가님 아니세요?"

저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분의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처음 본 분이었어요. 너무 놀라서 물었습니다.

"어머, 절 어떻게 아세요?"

알고 보니, 인스타그램에서 북스타그램을 하는 인친님이셨어요. 밀라노에 단기연수로 오셨다는군요. 지난주에 저희 교회에 처음 오셨을 때 저희 두 아이를 보고는 어디서 많이 본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대요. 그리곤 오늘 저를 딱 만난 것이었지요. 인스타그램에서 저는 제 얼굴을 대놓고 나대고 있는데 그녀는 저와 다르게 꾸준히 책을 읽고 리뷰를 남기는 진정한 북스타그래머였어요.

이 넓은 밀라노에서 저를 아는 누군가를 만난 사실이 정말 고무적이었어요. 게다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뇨! 나중에 함께 카푸치노 한잔 하기로 약속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작가라는 타이틀이 조금 부담스럽고, 앞으로 어떤 글을 써야 할지 고민이 많던 시기에 만난 독자님은 저에게 다시 열심히 쓸 이유가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될지 모를 독자님들에게 덜 부끄러운 작가가 되고 싶어 졌어요.

이렇게 또 글태기와 책태기를 극복해가고 있습니다.



작가님,

저희가 쓰는 이 편지의 수신인과 발신인은 저와 작가님, 이렇게 정해져 있지만 엄마로, 아내로, 여자로, 한 사람으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공감과 위로를 줄 수 있다면, 이 편지를 계속 쓸 이유로 충분한 것 같아요. 다행인 것은 아직은 이 편지를 쓰는 것이 즐겁다는 것입니다. 특별한 목적이 없더라도 즐거우면 된 것이겠지요?


곧 다가올 작가님 아이들의 방학은 또 어떤 패턴을 만들어 갈지 기대되네요. 제 아이들은 달팽이처럼 아주 느리고 끈적한 점액질을 남기며 방학을 뒹구는 중입니다. 이번주에는 아이들을 피해 홀로 외출을 감행할 예정이에요. 저 혼자만의 시간이 절실하게 필요한 요즘입니다. 다음 편지엔 '엄마의 일탈'이 어떻게 끝났는지 알려드릴게요.


작가님의 일상이 평안하길 바라며,


FROM. 밀라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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