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밀라노
작가님, 잘 지내고 계신가요. 아이들의 방학은 엄마의 개학이라는데, 작가님의 일상이 무탈하신지 궁금합니다. 종종 인스타 피드나 스레드에 올라오는 작가님의 일상 이야기를 엿보며, 그래도 꽤 잘 지내고 계신 것 같아 안심합니다. 저희 집 아이들은 다음 주부터 긴 방학에 들어가요. 저의 개학일도 머지않았네요. 담담하게 맞이하려고 매일 마음을 수양하는 중입니다.
작가님이 온라인 공간에서 알게 된 분의 암 투병 소식에 황망해하신 마음, 너무 잘 알 것 같습니다. 저도 몇 년 전 너무 가까이 지내던 언니의 투병 소식을 알게 되었던 날,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밤늦도록 울기만 했던 기억이 선명하거든요. 그 후로 언니는 몇 번의 재발과 회복을 반복하는 듯했습니다.(구체적인 것은 묻지 못했어요. 두렵기도 했지만 언니도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았거든요.) 그러다 올 2월 언니가 다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더 이상 먼저 연락하지 못하고 있어요. 마지막 연락에서 언니가 ‘좀 괜찮아지면 연락할게.‘라고 했거든요. 언니의 연락을 기다리며, 자주 기도하는 마음이 되고 자주 간절해집니다.
지난 편지의 말미에 작가님이 남겨주신 질문,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갈 시간은 얼마나 남았을까요?’를 붙들고 며칠을 앓았어요. 정말 작가님 말씀처럼 바로 내일이라도 세상을 떠날 수 있는 게 우리니까요. 그렇게 연약한 우리니까요. 그런 생각을 오래 하다 보면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고 괜히 삶이 허무해지기도 합니다. ‘남은 삶을 알 수 없으니 하루하루 잘 살자!’라는 결론만큼이나, ‘남은 삶을 알 수 없으니 하루하루 대충 막 살자!‘라는 결론도 일견 합당해 보여서일까요.
올해 초에 한참을 빠져 읽던 책이 있습니다. 김영민 교수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와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입니다. 그 당시가 투병 중인 언니와 마지막 연락을 했던 때였기에 두 책에 더 깊이 몰두했던 것 같아요. 외면하고 싶었지만 죽음이라는 단어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고, 그럴수록 ‘산다는 건 뭘까, 삶이 참 허무하다’ 같은 생각들도 함께 부유했거든요.
두 책을 차례로 읽으며 남은 생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매일을 잘 살아내보자라는 결심을 했던 기억도 납니다. 물론 그 이후로도 허무와 우울은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지금 제 마음이 제법 단단해진 걸 보면 책 속에서 만난 문장들이 제 안에 무사히 남아 있는 듯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을 직면하고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잠시 후 모두 죽는다고 생각하면, 자신을 괴롭히던 정념으로부터 다소나마 풀려날 것이다. 평생 원했으나 가질 수 없었던 명예에 대한 아쉬움도 달랠 수 있을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인생이라면, 영원히 살 것처럼 굴기를 멈출 것이다. (중략) 우리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좀 더 다르게 살게 되겠지. 그래, 근심을 버리고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프롤로그 중
작가님이 편지에 남겨주신 말과 아주 유사하지요?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이라는 말도, 그것을 알고 나면 전과는 조금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말도. 근심을 버리고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것도.
아직 저는 두 아이가 어리다 보니, 아침 등교 등원 전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요. 아침이면 마음이 바빠서인지 한 번만 해도 될 잔소리를 두 번 세 번 하게 되고, 부드럽게 말해도 될 것을 좀 더 무섭게 말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전쟁 같은 아침을 보냈더라도 꼭 지키는 한 가지가 있어요. 아이를 배웅하는 일입니다. 아이가 현관문을 나설 때 꼭 함께 나가 엘리베이터를 눌러줍니다. 가라앉지 않은 마음을 외면하고 아이를 안아주고 머리를 한 번 쓸어줘요. 마지막으로 아이가 탄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을 때쯤 복도의 창문을 열고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어줍니다. 아이가 더는 위를 올려다보지 않고 등굣길을 달릴 때까지요.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배웅일지도 모르니까요.(당연히 그런 일은 없어야 하고, 없기를 간절히 바라지만요!) 아이와 잠시라도 이별하는 모든 순간에는 혹시 기분이 언짢은 일이 있었더라도 감정을 누르고 사랑을 담아 이별하려고 노력합니다.
다행히 저는 우리의 삶이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인 이후, 허무보다는 열심 쪽으로 마음이 더 기웁니다. 뭘 하더라도 조금 더 열심히, 나중에 후회가 덜 남도록, 최선을 다해서 해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때 조금 더 해볼 걸, 그때 조금 더 표현할 걸, 그때 조금 더 사랑할 걸. 그런 마음으로 생의 마지막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마지막이 언제일지 모르기에 더욱더.
요즘 저의 일상은 아주 단순합니다. 아이들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의 등교 등원을 마치면 운동을 합니다. 운동이 끝나면 점심을 먹고, 원고 작업을 해요. 아이들이 돌아오면 저녁을 먹이고 집안을 정리한 뒤 아이들을 재웁니다. 그리고 시를 필사하고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단순한 루틴을 지키는 마음의 기저에는 하루치의 삶을 잘 살아내고 싶다는 소망이 있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오늘을 큰 변수 없이 잘 보내고 싶다는 작지만 큰 소망이요.
패턴은 일상의 행동에 작은 전구를 일정한 간격으로 달아놓는 일이기에, 삶은 패턴으로 인해 조금이나마 빛나게 된다. 이 반복과 패턴이 자아내는 아름다움과 리듬은 뭔가 지금 제대로 작동 중이라는 암묵적인 신호를 보낸다. 그 규칙적으로 작동되는 세계 속에서 당신도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신호를 전해온다. 그 신호에 반응하는 마음이야말로 일상의 어둠에서 인간을 잠시 구원할 것이다. 자기 안에서 무엇인가 정처 없이 무너져 내릴 때, 졸렬함과 조바심이 인간을 갉아먹을 때, 목표 없는 분노를 통제하지 못할 때, 자기 확신이 그만 무너져 내릴 때, 인간을 좀 더 버티게 해 줄 것이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시간 속의
삶’ 중
제가 유지하는 하루치의 루틴은 저를 안심하게 합니다. 반복되는 일상은 ‘뭔가 지금 제대로 작동 중이라는 암묵적인 신호‘이자, 제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이 신호를 매일 수신하고 수신받으며, 저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주는 두려움의 무게에서 조금 벗어난 느낌을 받습니다. ’언제가 되었든 마지막은 올 것이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오늘을 살자‘고 매일 다짐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문득, 다음 주면 아이들의 방학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상기합니다. 저의 안전한 루틴이 산산조각 나기 일보직전이군요. 한동안은 반복과 패턴 대신 이벤트와 변수가 일상을 파고들겠습니다. 그럼에도 크게 두렵지 않은 것은 ‘언제까지 아이들이 나와 종일 몸과 마음을 부대끼며 함께 하고 싶어 할까’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런 시간조차 ‘시한부’와 다를 것이 없기에, 언젠가는 끝이 올 것을 알기에 두려움보다는 기꺼움으로 맞이해보려 합니다.(비장한 각오가 느껴지시나요.)
작가님의 일상에도 언제나 사랑이 함께 하시길 바라며. 사랑을 담아.
From. 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