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깊은 잠을 못 잤다. 16개월이 된 봄이는 시간상으로는 저녁 8시부터 아침 7시까지 통잠을 자지만 그 사이에 많게는 열 번 가까이, 적게는 서너 번을 울며 뒤척인다. 잠귀가 밝은 나는 그때마다 함께 깨서는 우는 아이의 등을 토닥거리며 다시 잠이 든다. 어떤 날은 너무 악을 쓰면서 울고 깨서 어디가 아픈가 싶어 아이를 살핀 날도 있다. 또 어떤 날은 아무리 토닥여도 진정이 되지 않아 결국 안아서 다시 재운 뒤 눕힌 날도 있다. 그렇게 자주 뒤척이고 우는 봄이 덕분에 아침나절에 반드시 투샷을 넣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셔야만 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언제 아이가 커피를 엎지를지 모르기에 따뜻한 커피를 마실 수가 없다.) 그렇게 카페인을 충전하지 않고서는 하루 일과가 돌아가지 않는다.
지금은 생존(?)을 위해 아메리카노를 마시지만, 나는 이십 대 초반부터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 커피잔을 들었을 때 코끝을 스치는 그 고소한 향기가 좋았다. 한입 머금었을 때 입안 가득 퍼지는 쌉싸름한 그 맛이 좋았다. 아무리 밥을 많이 먹은 후에도 한 잔 거뜬히 비워낼 수 있는 그 개운함이 좋았다.
아메리카노 다음은 핸드드립 커피였다. 원두마다 다른 향과 맛을 가진 커피에 매료되어 한 때는 핸드드립 커피를 전문으로 하는 카페를 찾아다녔다.
원두 가는 소리,
여과지 안으로 갈아진 원두를 사라락 붓는 소리,
입구가 길고 얇은 주전자 끝에서 따뜻한 물이 부드럽게 여과지 속으로 부어지는 장면, 드리퍼 아래로 커피가 내려오는 장면,
주변으로 퍼지는 커피 향기,
예쁜 잔에 부은 뒤 잔을 손에 쥐었을 때 느껴지는 따스함,
한입 머금었을 때 입안에 퍼지는 원두마다 다른 커피의 맛까지.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은 귀와 눈, 코와 손, 마지막으로 입까지 모든 감각기관을 다 자극했다. 천천히 내려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던 그 커피가, 그 시간이 다 좋았다. 그래서 오래도록 커피를 좋아했다.
다행히도, 모든 부분에서 예민한 내가 카페인에는 둔감해서 아무리 늦은 밤에 커피를 마시더라도 잠이 드는 데 문제가 없었다. 하루에 여러 잔을 마셔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스스로를 축복받은 몸이라 여기며 커피를 아주 많이 사랑했다.
그런데 첫 아이의 임신 기간 동안 지독한 입덧을 겪으면서 커피 향도 맡기가 싫어졌다. 그동안 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가 싶을 만큼, 임신 열 달 동안은 카페 근처에도 가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출산한 이후에도 모유수유를 했던 4개월까지, 입덧 때만큼은 아니었으나 커피 향과 맛이 고프지 않았다.
그러다 수유를 끝내고 아주 무덥던 여름날, 거의 1년 반 만에 처음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맛이란! 나는 금방 다시 커피와의 사랑에 빠졌다. 모든 순간이 처음이라 매사가 서툴고, 그래서 힘겨웠던 육아의 순간에 금방 내린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은, 잠깐의 여유를 찾게 해주는 돌파구가 되어주었다.
그러다 둘째 아이가 찾아왔고, 역시나 입덧은 지독했다. 마찬가지로 커피는 향도 맡기가 싫었고, 출산 후 5개월까지 단 한 모금의 커피도 마시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그렇게 커피를 좋아하던 나를 걱정했지만, 나는 단 한순간도 커피 생각이 나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도 놀라울 정도였다.
그러다 둘째 모유수유를 끝내고 다시 만난 커피는 이제 절대 헤어질 수 없는 영혼의 동반자가 되었다. 가끔 밤에 둘째가 너무 자주 깨서 힘이 들 때에는 '내일 아침에 눈뜨자마자 커피 마셔야지!'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 잠들기도 한다. 그 생각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솔직히 이제는 전처럼 커피 자체를 즐긴다기보다는 카페인의 힘을 빌려 하루를 버텨내겠다는 마음이다.
두 아이를 보다 보면 커피 한잔을 내려도, 혹은 사 와도 그 한잔의 맛과 향을 느끼며 마실 여유 따위는 없다. 그래서 빨대로 후루룩 네댓 번에 빨아서 다 마시기 일쑤고, 그것도 못할 때면 얼음이 다 녹아버려 밍밍하기 그지없는 커피를 마시는 것 또한 일상다반사다. 이제는 내가 커피를 좋아하는 건지, 커피의 카페인에 중독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매일 커피가 필요하다. 그렇게 고된 육아의 순간을 견딜 힘이 필요하다.
어쩌면 지금 나에게는 얼마간의 카페인보다 커피 한 잔이 식기 전에, 커피 안의 얼음이 녹기 전에 마셔낼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원두를 갈아 드리퍼에 부어 천천히 내린 핸드드립 커피 한 잔을, 향부터 맛까지 즐길 단 30분의 여유가 절실하다.
그래 맞다.
지금 나에게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하루 딱 30분의 향기롭고 쌉싸름한,
커피 한 잔의 쉼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