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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킴 Dec 06. 2018

진저와 함께 한 십오 년, 그리고 그 후

내 이럴 줄 알았다. 결말을 뻔히 알면서도 아이들을 위해서 자처한 고생길이었다. 가슴을 후벼 파는 슬픔에 몸부림치게 될 나의 미래가 훤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겁대가리 없이 작은 털 뭉치 하나를 데려왔다. 그리고 사랑을 주고 정성을 쏟아왔다. 무려 십오 년 동안이나!


주제넘은 짓이었다. 겉으로만 시끄러웠지 속은 물러 터진 내가 여리고 예쁜 것에 정을 붙였으니, 오늘의 결과는 이미 예상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세상 어디에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있겠는가. 두 아이가 그렇게도 강아지를 원하는데, 어린것들의 작은 소망(내게는 큰 책임이었지만)을 어찌 무시할 수 있었겠는가.



십오 년 전의 그 날을 뚜렷이 기억한다. 브리더를 찾아갔던 그 날을. 구질구질했던 집안과 어울리지 않게 예쁘고 사랑스러운 강쥐들이 가득했었다. 남편과 나는 하얀 강아지를 찾아 두리번거렸었다. 흰 개를 원했던 아이들이 스노위(Snowy)라는 문법적으로 이상한 이름까지 지어놓은 터였기 때문에, 우리 집에 와야 할 아이는 무조건 하얀 털을 가진 강아지여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 내게 다가왔던 한 강아지.... 베이지색 털에 비즈 같은 두 눈, 그리고 반짝이는 까만 코를 가진 녀석은 내가 좋아하는 테디 베어를 연상시켰다. 게다가 살갑게 다가오는 견성(?)이라니! 난 그만 한눈에 반해버렸고, 아이들이 흰 개를 원한다는 사실을 홀랑 잊어버린 채 덥석 그 녀석을 집어 들었다. 내 품에 안겼던 녀석의 콩닥이던 작은 심장 소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찬데, 벌써 십오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구나....


우리 가족의 삶에 살포시 날아든 생강 색깔 털 뭉치! 우리는 그 녀석을 진저라고 부르기로 했다. 사실 영어로 진저는 여자 이름이지만, 아이들이 녀석을 본 순간 떠올렸던 이미지였던 관계로 그 이름을 고수하기로 했다. 크림(Cream)의 드러머인 진저 베이커(Ginger Baker)도 남자인데,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예쁜 얼굴에 이름까지 진저라서 여자 개로 자주 오해를 받긴 했지만, 우린 그 이름에 만족했다. 파열음이 없는 부드러운 소리라서, 유난히 털이 보드라웠던 진저에게 안성맞춤인 이름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그 이름을 선택한 것을 몹시 후회한다. 진저는 요리에 관심 많은 내가 레시피 검색을 하면 자주 보게 되는 단어이다. 게다가 캐나다에 살고 있고, 유난히 채소 가게를 자주 들랑거리는 내가 어찌 Ginger라는 단어를 외면할 수 있냔 말이다. 며칠 전, 장을 보고 나오는 길에 영수증에 박힌 알파벳 다섯 개가 눈에 띄었다. G I N G E R! 순간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나는, 주차해 둔 차로 급히 뛰어 들어가 울고 말았다.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유용한 조언을 해드리겠다. 혹시 강아지 입양을 염두에 두고 계신다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단어는 절대적으로 피해 주시길. 대신 자주 접할 수 없는 고유 명사로 지어주시길 바란다. 오랜 시간 벗을 하던 녀석들이 떠나고 난 뒤에, 그 아이들의 이름이 곳곳에서 보이면, 괴로움이 더더욱 배가되기 마련이다. 코냑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의 주인이 장식장에 있는 코냑병을 보고 슬픔에 젖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개 이름은 부디 심사숙고해서 작명하시라.


사람들은 말한다. 십오 년을 살았으면 개로서는 장수를 누린 것이라고. 그렇지만 진저는 열 살 때 다섯 살짜리의 튼튼한 심장을 가지고 있었고, 열다섯 살이 되어서도 한 시간씩 산책하던 건강한 아이였다. 녀석이 워낙 건강 라이프를 누리다 보니, 남편과 나는 앞으로 몇 년 간 여행은 꿈도 꾸지 말 것이며, 내년 딸아이 졸업 때도 한 명만 갈 것을 계획했었다. 새벽 세 시에 오줌 누러 나가야 하는 노견을 남에게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그런데 이 녀석이 너무도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 오랜 시간 우리와의 감정 교류를 통해 눈치 백 단의 실력을 쌓은 영악한 녀석임을 고려해 보면, 우리를 위해 급히 세상을 뜬 것은 아닐는지.... 합리적인 의심을 해본다.



곧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온다. 크리스마스 때 진저와 함께 할 기쁨에 부풀어 있다가, 벼락같은 슬픔을 맞은 아이들이다. 우리 집엔 다시 한번 더 눈물의 폭풍우가 몰아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슬픔을 누르지 않기로 했다. 당분간은 감정이 이끄는 대로 내 몸을 맡기고자 한다. 지금은 진저와 함께 한 아름다운 시간이 고통 속에 갇혀있지만, 미소 띠며 추억할 수 있는 그 날이 올 때까지 진저를 그리워하리라.


다시 만나는 그날, 무지개다리 너머에서 힘차게 달려와 우릴 맞이해 줄 진저, 그때까지 행복하게 지내기를....


진저와의 재회 - 딸아이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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