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양이를 싫어했다. 사실 무서워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납량특집 영화와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 속 고양이는 앙갚음하고, 주인을 할퀴는 못된 동물이었으니까. 이런 나를 보고 남들은 끔찍한 모델들만 골라 고양이를 일반화시킨다고 했다. 고양이라는 동물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부정적 프레임을 씌웠다는 것이다. 나는 그 프레임이 단단해서 절대 벗겨지지 않을 줄 알았다. 다섯 마리의 새끼 고양이와 인연을 맺는 경천동지 할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삼십 년 전 길냥이 한 마리가 우리 집에 들어왔다. 배가 부를 대로 부른 도둑고양이였다. 재수 없다며 이런 아이들을 내쫓아버리는 시대였지만, 아빠께서는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셨다. 종이박스로 집을 만들고, 음식을 수시로 갖다 주신 것이다. 고양이를 싫어했던 나는 그 요물이 스스로 집을 떠나 주길 바랐지만, 어미 고양이는 편안히 머무르다 새끼까지 낳아버렸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 달리 태어난 새끼들은 예뻐도 너무 예뻤다.
아기 고양이들은 어리고 연약하다는 이유만으로도 보호 본능을 후벼 파기에 충분했었다. 어미의 젖무덤에 대롱대롱 매달려 살겠다고 기를 쓰는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작은 몸집을 꼬물대는 모양새는 또 얼마나 사랑스러웠는지!
그때 우리 가족은 새끼들이 눈을 뜨고, 발걸음을 떼며 고양이 꼴을 갖춰나가는 것에 매일같이 감탄해댔다. 고양이가 예쁜 생명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우리 눈에만 예뻤나 보다. 어느 날 어미가 새끼들을 버리고 달아난 것이다. 버림받은 아기들이 안쓰러웠던 우리는 어미의 매정함에 분노했고, 그 분노의 힘으로 다섯 마리의 새끼를 길러 입양 보냈다. 그때 검은 고양이 한 마리만 남겨뒀는데, 그 녀석을 ‘순돌이'로 불렀다.
턱시도 냥이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촌발 날리는 이름이었지만, 순돌이는 그 이름이 너무 잘 어울리는 아이였다. 나의 선입견을 모조리 박살을 내버릴 만큼 온순했던 것이다. 머리가 나쁘다거나 둔해서가 아니라, 인품 아니 묘품 자체가 그랬었다. 고양이의 털을 거꾸로 쓰다듬으면 할퀸다는 속설도 순돌이에겐 예외였고, 사진을 찍으려고 높은 곳에 올려놓으면 얌전하게 있던 기억도 난다. 그렇지만 녀석과의 인연은 안타깝게도 짧게 끝나버렸다. 순돌이가 집을 나가버린 것이다.
그 녀석에게 엄마의 유전자가 있었던 것일까? 주변 사람들은 도둑고양이의 피는 어쩔 수 없다며, 그걸 왜 거둬줬냐고 혀를 찼다. 나 또한 배신감에 순돌이를 원망했다. 목숨을 살려주고, 많은 사랑 또한 줬건만, 어떻게 우리 가족을 버릴 수 있냔 말이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순돌이의 가출은 당연한 결과였다.
우선 내가 집을 떠난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매일 고등어 통조림을 챙겨주고 같이 잠을 자던 내가 사라졌으니, 순돌이는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짐작되는 것은, 짝짓기 할 암컷을 찾아 뛰쳐나갔다는 가능성이다. 순돌이가 칠 개월 정도 됐을 때였으니까 수술을 해줬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땐 중성화 수술이 뭔지도 모르던 시절이었고, 개와 고양이가 집을 나가는 경우는 허다했다. 그런데도 나는 순돌이에게 은혜 모르는 고양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기억에서 지워버렸다. 무지함은 억울한 희생자를 낳는다.
그후 오랫동안 순돌이를 잊고 살았다. 십오 년간 강아지를 기르며 가끔 순돌이 생각을 했지만, 여전히 고양이는 은혜 모르는 동물이라 생각했다. 집 나간 순돌이와 달리 진저는 눈물나게 충성스러웠으니까. 아들이 타지에서 공부했을 때, 망부석이 될 정도로 기다리는 진저를 보고 역시 개는 고양이와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난 이미 세상을 떠난 진저를 차마 보내지 못하고 마음속에 품고 있다. 무지개다리 너머에서 순돌이가 나를 보면 무지 서운해할 것이다.
아들과 며느리가 아주 이상한 고양이를 입양했다. 이 아이는 진저의 말년에 친구로 잘 지냈고, 사람을 지나치게 잘 따르며, 외출하고 돌아오면 가족을 맞이한다. 먹는 건 또 얼마나 밝히는지 치사스러울 정도라서 개의 유전자가 잘못 들어간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음식을 잘 훔쳐먹고, 배가 터지도록 부른 상태에서 햇살 아래 길게 뻗어서 신선놀음하는 것을 좋아한다. 순백의 털과 우유라는 이름, 그리고 예쁜 용모와 달리 하는 짓이 아주 걸지다. 개냥이도 이런 개냥이가 따로 없다.
우유는 우리 부부가 가면, 의례 내 옆에 누워 잘 정도로 반죽도 좋다. 자다가 몸을 뒤척이면 아프지 않을 정도로 수위조절을 해가며 배려가 담긴 공격을 한다. 레슬러가 헤드락을 걸듯이 발을 붙잡고 노는데, 일부러 발을 흔들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아들은 미국, 나는 캐나다에 살아서 만날 기회가 자주 없는데도 이렇게 한 집 식구처럼 우릴 맞아 준다. 그리고 아침엔 내게 들러붙어서 밥을 달라 야옹거린다. 주인이 아닌 내게,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밥을 달라 아우성을 칠 정도로 넉살이 좋은 것이다. 그런 우유를 볼 때마다 나의 고양이에 대한 선입견은 무참하게 부서진다. 고양이는 쌀쌀맞고, 이기적이며, 어두운 면이 있다는 내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인지 스스로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고양이를 싫어하던 내가 왜 자꾸 고양이와 인연을 맺게 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두 마리의 고양이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에 흘러들었고, 그 아이들을 통해 내가 갖고있던 프레임이 벗겨지고 있는 이유가 뭘까? 너무 거창한 것 같지만, 이는 운명에 의한 만남이 아닐른지..... 운명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들먹이다보니, 우유와의 만남에 진한 의미부여를 하고 싶어 진다. 다음에 만나면 더 많이 쓰다듬어주고 기운이 빠지도록 장난감 깃털도 흔들어줘야겠다. 그리고 밤에 내 이불을 비집고 들어오면 순돌이 생각도 한번 해주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