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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킴 Jul 23. 2019

나의 오리발과 성수동 수제화

내게 신발 구매는 늘 큰일이었다. 발이 넓적한 데다 두툼하고, 오른쪽과 왼쪽의 사이즈까지 살짝 다르기 때문이다. 모양새가 그렇다 보니 맞춤 신발이 정답일 수밖에 없는데, 다행히 과거엔 내 발에 맞는 수제화를 쉽게 구매할 수 있었다. 다만, "희한하게 발만 발달하셨네요." 내지는 “발 볼이 남달리 건강하시네요"라는 수치스러운 멘트를 감내해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그때마다 나는 "먹는 게 다 발로만 가거든요"라고 가볍게 받아쳤지만, 내 속은 쪽팔림으로 뒤틀리곤 했었다. 왜 엄마는 이런 유전자를 내게 준 것인지! (나의 오리발은 백 퍼센트 엄마로부터 온 것이다.)


내 발은 235센티로 여자 발로는 표준 사이즈이다. 그렇지만 발 볼이 남달리 넓고 엄지발가락은 남자 것이라 해도 될 만큼 크고 못나서, 내 몸과 전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마르고 작은 체구에 달린 두꺼운 오리발 두 개를 상상해 보시라. 이 못난 발 덕분에 나는 ‘오리’라는 별명을 얻었고, 더불어 오리용 신발을 찾아야만 하는 불행 또한 떠안게 됐다. 그리고 이 불행은 나이가 듦에 따라 더욱 극한으로 가는 조짐이 보인다.



인간의 신체는 생활 습관과 중력에 의해 변형된다. 그 변화는 내게도 어김없이 왔는데, 최근 들어 가뜩이나 넓은 발의 폭이 더욱더 푸짐해졌다. 나이가 들면 신발을 한 사이즈 더 크게 신게 된다는 말을 절감하며 나의 발을 내려다보니, “젠장” 소리가 절로 나는 비주얼이다. 오십 년 넘도록 내 몸을 지탱했다는 사실을 참작하더라도, 두 발이 심하게 옆으로 퍼져버린 것이다.


형태가 변하다 보니 내 발은 기존의 신발들을 거부했다. 그래서 구두를 여러 켤레 처분해야만 했다. 오리발보다 칼발이 더 많은 이곳 캐나다에서 힘들게 득템 한 것들이었지만 미련 없이 그 아이들을 보내고, 나는 성수동 수제화에 희망을 걸었다. 맞춤구두를 주문할 기대에 한껏 부풀어서.....


오랜만에 고국 방문을 했다. 딸아이의 대학 졸업을 축하하기 위한 여행이었다. 할 일, 만나야 할 사람이 태산같이 많았지만, 나는 성수동을 찾았고, 거기서 유명하다는 대형 매장부터 가봤다. 그런데 직원이 이상한 제안을 한다. 신발 디자인을 고르면 내 발보다 한 사이즈 더 크게 만들어주겠다는 것이다. 그건 맞춤 제작이 아니잖냐는 내 말에 직원은 황당한 궤변을 늘어놓는다. "사이즈를 재는 것보다 그게 더 정확해요." 그녀의 이 한 마디에 신뢰가 땅으로 내동댕이쳐진 순간, 나는 그 가게에서 나와 버렸다. 어떻게 그런 뻔뻔한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다른 가게에 가봤다. '오리발, 무지외반증, 족저 근막염'을 환영한다는 문구를 보니, 그곳은 발에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 배려가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들었다. 그러나 웬걸. 여기서도 직원은 맞춤 아닌 맞춤 신발을 강요했고, 정확하게 치수를 재는 것보다 대충 사이즈를 때려 맞추는 그들만의 방법이 더 정확하다는 이해 불가한 논리를 내세웠다.


그들의 짜 맞춘듯한 거짓말에 열을 받은 데다, 시차 때문에 극도로 피곤했던 나는 일단 성수동을 떠났다. 다시 가서 제대로 된 맞춤 서비스를 하는 제화 업자를 찾겠다는 결심과 함께. 첫 성수동 방문이 몹시 실망스러웠지만, 맞춤 수제화가 간절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바빴던 일정에 쫓기다 그냥 캐나다로 돌아왔다. 그 후 맞춤 수제화에 대한 미련을 지워버린 나는 우연히 성수동에 대한 인터넷 기사를 보게 되었다.


제화 업자들의 삭발 투쟁과 성수동의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기사였다. 나를 분노하게 만든 성수동의 비양심 논리가 '밥벌이의 고단함'이란 변명으로 가려지는 순간이다. 기사를 읽고 나니 성수동의 명소라는 카페가 생각났다. 그곳은 한산했던 신발 매장들과 달리 붐볐고, 저렴한 신발 가격에 비해 커피값은 강남과 다름없었다. 그때 나는 제화 업자들이 감당하기엔 성수동의 월세가 힘겨울 것이며, 카페 부근이 개발되는 것을 보건대 월세는 계속 오를 것이라는 예측을 했었다. 이런 나를 보고 ‘여기뿐 아니라 요즘은 다 힘들다’고 한 동생의 멘트를 떠올리니 여러 가지로 속이 시끄러워진다.



성수동에서 샀던 구두를 꺼내 본다. 매장 직원을 불신함에도 불구하고, 착용감이 부드러워 구매한 것이다. 그들은 맞춤이라 우기지만, 절대 아니라는 흔적이 도처에서 포착된다. 우선 신발 너비가 전체적으로 비율이 안 맞게 한 군데만 퍼져있는 걸 보니 매장에 있던 신발을 강제로 늘려놓은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원래 내 사이즈보다 더 큰 신(발 볼 넓은 사람을 위한 배려?)에 밑창을 깔아놨는데, 덕분에 발바닥은 편하지만, 문제는 밑창 두께 때문에 신발의 높이가 낮아져 발등을 아프게 한다.


캐나다로 돌아온 후, 딸아이는 그 신발을 살려주겠다며 유튜브에서 발등 아픈 신발 늘리는 법을 열심히 검색하더니 몇 가지 방법을 알려줬다. 그러면서 다시 한국을 가더라도 성수동은 가지 말란다.


그날 내가 어떻게 했으면 기분 좋게 성수동을 떠났을까? 제대로 신발을 만들어 주는 대가로 추가 비용을 제시하거나, 그 동네를 뒤져 정직한 제화 업자를 찾아야 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성수동의 신발이 수제화로써 충분한 퀄리티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가 종종 들리고, 내가 구매한 구두 또한 사용한 자재와 마감이 만족스럽지는 않기에, 더는 성수동에 미련을 갖지 않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상식 이하로 낮은 제화공들의 임금과 계속되는 불황에 저가 신발을 만들 수밖에 없는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해진다. 그들이 설 자리는 어딘지....... 마음만 오지랖을 떨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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