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를 발표한 1937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디즈니는 많은 공주를 스크린에 올려왔다. 초창기의 공주들은 접시만한 눈에 바비 인형의 몸매를 가진 백인 미녀들이었으며, 백마 탄 왕자님에게 구원받는 수동적 인물들이었다. 그러다 1990년대에 <뮬란>과 <알라딘>을 통해 새로운 공주들이 등장하게 되는데, 유색인종인 데다 자의식이 강한 그녀들은 과거의 공주들과 사뭇 다른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인물 설정은 올해 개봉한 실사판 <알라딘>에 이르러 정점을 찍는다. 2019년의 자스민 공주는 다른 곳도 아닌 이슬람 국가에서 술탄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공주의 꿈이 왕이 되는 것이었고 그 꿈이 실현됐다니, 실로 획기적 변화이다. 그렇지만 과연 디즈니가 제시한 21세기형 공주는 충분히 관객을 납득시켰을까?
과거엔 디즈니 공주들의 이미지가 별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 여자아이들은 글자를 익힘과 동시에 동화책에서 왕자와 공주 이야기를 읽었고, '현모양처'라는 직업 아닌 직업을 강요받던 시대였으니까. 그러나 현대로 오며 디즈니 영화 속 공주들은 엄마들의 심기를 건드린다. 타고난 외모 하나로 인생 역전을 이뤄낸 공주들 이야기는 너무나도 시대와 동떨어져 있지 않은가.
키이라 나이틀리는 엘렌 쇼(The Ellen Show)에서, 딸에게 <신데렐라>와 <인어 공주>를 보지 못하게 한다고 말했다. 남자에 의해 구원받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목소리를 포기하는 공주들이 나오기 때문이란다. 사실 나도 오래전에 이 같은 고민을 한 바 있다. 새엄마에게 당하기만 하는 신데렐라가 심성 고운 아가씨로 그려지고, 잠만 자다가 왕자에게 성추행(키스)을 당한 뒤 팔자를 고친 공주가 나오는 만화를 딸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1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굳이 시청 금지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어차피 친구네 집에 가면 볼 수 있는 것을 굳이 막는다면, 아이는 길티 플레져를 느껴가며 볼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만화를 보여주되, 공주들의 문제점에 대해서 아이와 토론(설교?)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그때 딸아이와 나는 백설공주와 신데렐라의 고구마 캐릭터에 열 받았다. 아빠를 설득해 불행에서 탈출하려는 시도를 했어야만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외모만 보고 공주를 데려간 왕자들의 사랑이 진실 할리가 없으므로, 공주들의 미래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더래요"일 수가 없다고 단정지었다. 기특하게도 딸 아이는 '스스로 인생을 헤쳐나가야 한다'는 만족스런 결론을 내렸다.
당시 유치원생에 지나지 않던 딸아이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고, '동심 파괴'라며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 동심이란 것이 미모를 팔아서 트로피 와이프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이라면 깨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혹자들은 말한다. <알라딘>의 자스민 공주(만화와 실사판 모두)는 기존의 공주들과 다른 모습이라고. 물론 1992년 판 자스민은 자기주장이 강하고 적극적이다. 그녀는 자신을 모욕한 자파의 얼굴에 포도주를 끼얹고, 결혼을 강요하는 아버지에게 반항한다. 그렇지만 자신의 외모를 무기로 삼는다는 점에선 과거의 공주들과 여전히 맥을 같이 한다. 그녀의 의상은 지나치게 노출이 강하고, 위기 탈출의 순간에 자신의 매력을 이용해서 남성을 유혹한다. 즉, 여전히 공주는 '아름다운 여자'로 대상화됐었다.
이와 비교한다면 2019년에 실사화된 <알라딘>의 자스민 공주는 훨씬 더 주체적인 모습이다. 미모가 아닌 언변으로 신하를 설득하고 자파와 기싸움을 벌이며 술탄이 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그러나! 술탄이 되겠다는 그녀, 과연 술탄 자격이 있는 걸까?
술탄은 아랍어로 권위 또는 황족을 지칭하며 국가를 통치하는 군주를 말한다. 그러니까 정치와 경제, 게다가 군사까지 두루 통솔하고 백성들의 삶 또한 보살펴야 하는 자리인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자스민은 정의감이 남다르고, 용감하며, 인간미 있는 공주로 그려져 있다. 그녀는 악의 무리에게 호통을 치고, 몰래 궁을 빠져나와 민초들의 삶을 둘러보기도 한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술탄이 된다는 건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극 중에서 그녀는 눈물을 쏟아가며 온 몸으로 <Speechless>를 부른다. 이 곡은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 것이며, 새 시대가 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녀는 노래를 통해 인습에 불응할 것이라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그러나 굶주린 아이에게 장사꾼의 빵을 멋대로 집어줄 정도로 세상 물정에 어둡고 순진하며, 절대 빈곤층이 대부분인 자신의 왕국을 아름답다고 표현하는 그녀가 과연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A Whole New World>를 노래할 때도 자스민은 그저 아름다운 세상을 예찬하며 알라딘과 썸을 탄다. 배고픈 아이와 좀 도둑질을 하며 살아가는 알리딘의 삶을 본 그녀인데도 말이다.
결국, 큰 자각 없이 극에 묻어간 자스민의 캐릭터는 끝내 나를 설득시키지 못했다. 침묵하지 않겠다고 목이 터져라 노래를 하는 그녀에게서 여왕의 탄생이 아닌, 술탄이 되겠다고 우겨 대는 공주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철옹성보다 강한 이슬람의 관습을 뚫은 여성이라면, 이에 걸맞은 모습을 보여줬어야 했다. 새로운 서사에 의해 탄생한 공주님의 모습에 무조건 수긍할 수 없는 것이 바로 그 이유이다. 캐릭터가 얇팍한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