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달 전쯤이었다. 옆집 부부가 자기네 차로 오라며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그들과 나는 별 소통 없이 살았기 때문에 웬일인가 싶었다. 다른 이웃들과는 자주 담소를 나누며 친하게 지냈지만, 늘 무표정한 데다 유난히 과묵한 옆집에는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차로 다가가니, "우리에게 새 친구가 생겼어요."라고 남자가 말한다. 여자는 품에 안고 있던 강아지를 봬 주었다. 방금 공항에서 데려왔다는 순한 눈매의 작은 개가 나를 쳐다봤다. 한국에서 입양했단다. 두 살 정도로 추정된다는 그 아이는 오랜 비행을 했음에도 활기차 보였고, 내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눈을 지그시 감으며 좋아했다. 공항에서 집까지, 개 부모 경력이 꼴랑 한 시간인 그들은 자신들의 개가 얼마나 착한지 아냐며 벌써 자랑을 늘어놓았다. 사실 그 아이는 온순하고 사람을 잘 따랐다. 유기된 개들이 갖기 쉬운 두려움이나 공격성이 없어서, 새 주인은 물론 나 또한 아주 잘 따랐다. 사람을 좋아하니 패밀리 독으로 완벽한 아이였다. 단, 한 가지 문제점만 빼고!
토마토는 주인의 출근에 극도로 예민하게 반응했고, 혼자 있는 시간을 못 견뎌했다. 옆집 부부가 출근 준비를 할 때부터 퇴근할 때까지 내리 울어댔는데, 이는 전 주인에게 버려진 뒤에 생긴 '분리 불안 장애'가 분명했다. 토마토라는 귀여운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찢어지는 소리로, 그것도 하루 종일 울어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민원이 들어오고 옆집 부부의 행복했던 표정은 차츰 괴로움으로 바뀌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남자의 출근 시간이 새벽 다섯 시, 그리고 여자는 오전 아홉 시였다는 것이었다. 두 명의 주인이 차례로 집을 떠날 때마다 울어대는 녀석 덕분에 우리 아파트 주민들은 새벽과 아침에 연달아 강아지의 울부짖음을 들어야 했으니까. 게다가 그들이 집에 돌아올 때까지 줄기차게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저렇게 울어대다 목청이 남아날까, 울다 지쳐 기절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듣는 사람들 또한 마음이 편치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토마토는 한 달 이상을 죽자고 울어댔다. 주인과 함께 할 땐 한없이 순한 녀석이 혼자 있게 되면 갑자기 돌변, 괴성을 지르며 울어댔다. 그래서 결국..... 그 녀석은 다른 집으로 보내지고 말았다.
옆 집에서 토마토를 파양 했다고 하고 싶진 않다. 친정 엄마를 모셔다 놓기까지 하며 노력한 그들이니까. 무엇보다 그들은 토마토에겐 늘 함께 있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수소문 끝에 어떤 은퇴한 부부가 토마토의 아픔을 보듬어주겠다고 나섰고, 눈물의 이별을 했다. 늘 조용하고 차분한 옆 집이지만 입양이 결정됐을 땐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토마토를 잃는 슬픔과 더불어, 죄의식과 반성에서 터져 나온 눈물이었다. 그들은 토마토에게 몹쓸 짓을 했다며 자책했다. 유기견은 마음의 상처가 있기 마련인데, 자신들이 좀 더 신중하게 입양을 결정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착한 마음 씀씀이 덕분일까? 다행히 토마토는 새 보금자리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한다. 새 주인이 토마토의 근황을 자주 보내주는데, 최근에는 다른 개들과도 잘 어울려 논다고 한다. 그래서 토마토가 보고 싶지만 더 나은 환경에 있으니 다행이라며 씁쓸한 미소를 짓는 옆집을 보니, 이만하면 녀석은 잘 타고난 팔자인 듯하다. 너무나 많은 개들이 버려지는 한국에서 토마토 같은 행운을 잡을 수 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한 웹사이트를 통해 토마토를 데려왔다는 옆 집의 말을 듣고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정말 많은 한국의 개들이 외국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과거에 고아를 수출하던 나라가 이젠 버려진 개를 수출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존엄성이 전무한 상황에서 쿠키 찍어내듯 강아지를 만들고, 안 팔리면 안락사를 시키고, 팔려간다 해도 상당 수가 버려지고 해외로 입양되고....
토마토가 떠나던 날, 마지막 산책을 데리고 나가던 옆집 남자와 마주쳤다. 오늘 밤 데려다 주기로 했다며 벌겋게 슬픔이 차오른 얼굴로 토마토를 내려다보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무것도 모르는 토마토는 그저 즐거워 꼬리치고 있었다. 그때 내가 마지막으로 토마토를 안아주며 했던 말을,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다시 한국어로 해 주고 싶다. "착한 토마토~ 다 괜찮아질 거야. 행복해야 해~"
그때 난 왜 영어로 말했을까? 한국말로 해줄 것을! 토마토에겐 아직 한국어가 더 익숙했을 텐데 말이다. 내가 "앉아"라고 말하면 스낵을 기대하며 쪼그리고 앉아있었고, 옆집 부부에게 tomato의 한국어 발음인 "토마토"를 배우게끔 만든 녀석이었는데 말이다.
멀디 먼 캐나다까지 와서 나와 짧은 인연을 맺었던 토마토. 우리 집 앞에서 늘 코를 킁킁거렸다는 녀석을 생각하니 마음이 저려온다. 새 보금자리 근처에도 한국 사람이 있어 그리운 고국의 냄새를 맡을 수 있으려나? 어린 나이에 나라와 집을 바꿔가며 떠돌고 있지만, 사랑으로 떠나보낸 옆집 부부의 애틋함을 마음에 품고 잘 살 것이라 믿는다.
토마토야! 그깟 트라우마, 밴쿠버에 널리고 널린 까마귀나 줘버리렴. 그리고 네게 있었던 일 다 털어버리고 이젠 행복하게 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