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불현듯 아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이메일 계정 하나가 떠올랐다. 그저 자연스레 사용하지 않게 됐을 뿐인데, 불현듯 떠오른 그 생각 끝에 그보다 더 큰 불안감이 몰려왔다. 이메일들.....
엄마와 주고받았던 이메일들 말이다.
나는 오랜 세월 해외에서 지낸 터라 이메일이 보편화된 이후로는 엄마와 자연스럽게 이메일을 자주 주고받았었다. 그 소중한 이메일들이 내가 무심코 내버려 둔 계정 안에 모두 들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갑자기 초조했다.
'지워졌으면 어떡하지.. 휴면계정 못 살리면 어떡하지.. 비번이 뭐였더라.....'
나는 해당 이메일에 접속하여 떨리는 마음으로 차근히 로그인 버튼을 눌렀다. 오래전 사용하던 비번을 눌러봤다.
그럼 그렇지.. 안 먹힌다.. 이를 어쩌나...
가능성 있는 비번을 차례대로 찍어봤다.
초조한 마음 부여잡고 되살려본 기억의 조각들 속에 그나마 세 번째 만에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이메일 계정을 깨울 수 있었다.
후유.... 정말 다행이다....
떨렸다. 마주할 수 있을까.. 나는 그 안에 글자로 남아 있는 엄마를 담담하게 만날 수 있을까.. 아주 많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꽤 여럿 되는 이메일들이 별도의 폴더에 고이 저장되어 있었다.
엄마의 성명을 보는 순간 이미 마음은 끝없이 먹먹했다.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볼 수 있는데, 선뜻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보낸 이의 이름과 서브젝트, 그리고 받은 날짜... 계속 스크롤 다운하며 그 세 가지 정보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잠시 후 망설이다 마우스를 클릭했다. 그 안에 우리 엄마가 이야기하고 계셨다. 이메일로 가볍게 주고받다 보니 참 시시콜콜한 수다도 많았다. 좋은 글귀가 있어 보내준다는 얘기, 엄마 아빠의 35주년 결혼기념일 식사 사진, 뭐가 그리 속상하다고 잔뜩 써 보낸 건지 내 맘을 달래주려는 엄마의 답장, 심심할 때 들어가 보라는 쇼핑몰 정보까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진 오래전 그때의 대화들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언제 다시 엄마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지 사실 장담할 수 없었다. 세월이 가면 조금은 담담해지려니.. 그렇게 조금씩 슬픔도 그리움도 옅어지려니 생각했는데, 엄마라는 존재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깊어지고 짙어질 뿐 그 반대란 있을 수 없다는 것만 깨닫게 됐다.
그렇게 살다 보니 13년이 지났다. 엄마의 마지막을 마주하던 그날 밤 병원 침상 앞에서의 시간이 너무도 생생한데 그래도 어찌어찌 살아가다 보니 강산이 한 번 바뀔 만큼의 시간이 더 흘렀다. 남들은 아픈 기억을 글로 꺼내 놓으며 치유받는다고 하던데, 나는 아직 그런 시도를 못해봤다.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에 그 어떤 말도 꺼내놓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무던히 덤덤하게 살아간다고 애쓴 세월이다. 일부러 지우려 했던 건 아닌데, 그저 바삐 살아가다 보니 그렇게 이메일을 저장해놨다는 사실조차 잊고 지냈다. 그런데 그 안에 그토록 그리운 우리 엄마가 살아 계셨다. 엄마의 잔잔한 염려와 당부 말씀들, 잘 커줘서 고맙다는 엄마의 진심 어린 이야기들을 다시금 마주하며 너무나도 그리운 우리 엄마를 다시 만난 것 같았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내게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셨던 우리 엄마를 다시 마주하고 이야기 나눈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하마터면 기억 저 너머로 사라질 뻔한 휴면계정 하나를 깨움으로써 나의 오랜 그리움과 마주하게 되다니... 너무나도 뜻밖에 찾아온 소중한 선물이었다.
왠지 엄마랑 이야기 나누고 싶을 때는 조용히 이메일을 열어봐야겠다. 그럼 엄마의목소리가 묻어있는 다정한 염려와 당부의 말씀들이 다시금 나를 위로해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