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est thing in life is to love and be loved in return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이다)
물랑루즈 영화에서 주인공 크리스티안이 자전적 러브 스토리의 글을 마무리하며 썼던 내용이다. 이 지독하게도 순도 높은 사랑 이야기는 2001년 니콜 키드먼과 이완 맥그리거가 주인공으로 등장한 뮤지컬 영화의 서사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그 진한 사랑 이야기가 이번엔 진짜 뮤지컬이 되어 국내 무대를 찾아왔다. 영화를 바탕으로 한 이 뮤지컬 작품은 2018년 보스턴의 에머슨 콜로니얼 시어터에서 초연되었고, 이듬해 2019년 6월에 뉴욕 브로드웨이에 입성했다. 제74회 토니 어워즈에서 1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어 최우수 작품상을 포함한 10개 부분에서 수상을 했으니 실로 대단한 뮤지컬임은 분명하다.
이번 서울 공연의 의미가 더 큰 것은 바로 아시아 지역 초연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극장이 코로나로 대대적 몸살을 앓고 있을 때에도 굳건히 공연을 끈질기게 이어가던 대한민국의 뮤지컬 무대는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국내 뮤지컬 공연 시장이 엄청난 규모로 성장을 이룬 가운데, 세계 주요 뮤지컬 컴퍼니들이 아시아권에서 주목하는 주요 무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마스크 착용에 그토록 협조적이었던 대한민국 대중의 업적이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이 물랑루즈라는건 도대체 무엇일까? 19세기말부터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까지 프랑스사회 전반의 발전으로 번성했던 시대를 일컫는 벨 에포크(Belle Époque-좋은 시절) 시대 중 1889년,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 언덕 끝자락에 조셉 올러와 그의 매니저였던 찰스 지들러에 의해 세워진 카바레의 명칭이다. 직역하자면 붉은색(rouge) 풍차(moulin)를 의미한다.
획기적인 건축물에서 매일밤 춤과 샴페인이 넘쳐나는 축제로 물랑루즈는 대 성공을 거두게 되었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캉캉춤'의 시발점이 바로 이곳이었다고 한다. 너풀대는 드레스를 한껏 들춰 올리며 다리를 쭉쭉 뻗어 올리는 다소 자극적이고 야한 캉캉춤은 카바레에서 춤을 추던 코르티잔들에 의해 소개가 되었다고 한다.
물랑루즈는 1915년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10년 뒤 재건되어 다시 오픈하였고 현재까지도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핫 스폿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코르티잔(Coutesan)- 상류층을 상대하는 고급 매춘부나 상류층의 정부精婦를 일컫는 말
실제 몽마르트르에 위치한 물랑루즈의 전경(출처: 위키백과)
또다시 명절에 공연장을 찾은 나는 극장 문이 열렸을 때 멀리 보인 무대의 모습을 보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온통 붉은색으로 치장된 오디토리움과 유독 눈에 띄는 파란 코끼리, 그리고 조용히 돌아가고 있는 풍차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나치게 매력적이었다. 시선강탈의 이 파란 코끼리는 실제 영화와 뮤지컬 속에서 여 주인공 사틴의 분장실이 위치한 곳으로 대사 중에 표현된다.
사실 대다수의 뮤지컬 공연에서는 오디토리움 내에서의 그 어떤 촬영도 허용하지 않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는 무대 세트 디자인의 저작권 이슈가 얽혀서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화려한 무대를 보는 즉시 핸드폰 카메라를 만지작거리게 되는 것이 요즘 세상 인지상정 아니던가. 그런데 죄다 촬영을 금지하니 그저 아쉬움만 꿀꺽 삼켜야 하는 때가 많건만 이렇게 화려하고 멋진 무대를 마음껏 사진과 영상 속에 담아 갈 수 있게 해 준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대신, 쇼가 시작되기 10분 전부터 카바레 배우들이 무대 위에 등장하는데, 이때부터는 그 어떤 촬영도 허용하지 않으니 이 부분만큼은 잘 지켜주면 좋을 것 같다.
이 프리쇼(Pre-show)에서는 극장 내에 울려 퍼지고 있는 관능적이고 섹시한 음악에 맞춰 코르셋을 착용한 카바레 배우들이 무대 위를 거닐기만 한다. 이는 물랑루즈의 분위기를 관객들에게 충분히 전달해 주기 위한 중요한 사전 장치란 생각이 들었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주크박스 뮤지컬이란 기존에 이미 나와 있는 대중음악들 중에서 작품의 주제와 어울리는 곡들을 엮어 뮤지컬 넘버로 재탄생시킨 작품을 일컫는다.
2001년 영화가 개봉됐을 당시 사실 영화는 못 봤지만 한창 이슈가 됐던 'Lady Marmalade'의 뮤직 비디오는 많이 봤던 기억이 난다.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릴 킴, 마이아, 핑크 네 사람이 이 곡을 불러 화제가 됐었는데, 공연 도입부에 주인공 크리스티안의 짧은 내레이션에 이어 바로 울려 퍼지는 'Welcome to the Moulin Rouge'와 함께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누구나 슬쩍 어깨를 들썩이게 된다.
간략히 스토리를 정리해 보자면, 시기는 1900년으로 미국에서 건너온 젊은 작곡가 크리스티안이 카바레의 대 스타 배우인 사틴과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금전적 위기에 빠진 카바레를 구하기 위해서는 젊은(young & rich) 공작의 투자가 필요한데 그의 투자 요건이란 사틴을 포함한 카바레 전체의 소유권을 자신이 갖는 것이었다. 돈으로 사랑까지 사려는 자와 그의 뒤에서 몰래 진정한 사랑을 나누며 줄타기를 하는 순수한 청년과 화류계 여인의 다소 진부해 보이는 이야기인 것이다. 사틴의 마음까지 얻으려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공작이 결코 가질 수 없었던 것이 바로 그녀의 사랑이었고, 그는 질투에 눈이 멀어 투자금을 걷어 들이겠다는 협박과 더불어 크리스티안을 살해하려는 시도까지 하게 된다.(이 부분은 뮤지컬에선 그리 상세하게 묘사되진 않는다)
다소 뻔하고 어찌 보면 정해진 결말을 향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기를 거듭해도 식상하다 하지 않고 꾸준히 찾아오는 소재인 것을 보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인간의 본능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작품의 말미에 등장하는 대사가 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truth), 아름다움(beauty), 자유(freedom), 사랑(love)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뻔하디 뻔하지만 작품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 누구도 돈으로 사랑을 얻을 수 없으며 결코 타인의 자유를 억압해서는 안된다고 말이다.
나는 이 작품을 보며 여지없이 오페라 '라 보엠'이 떠올랐다. 사실상 두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동시대이고, 역시 젊은 보헤미안(아티스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라 보엠에 등장하는 주인공 로돌포 역시 작가였으며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과거 코르티잔 출신 연인과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물랑루즈에 등장하는 크리스티안도 작가/작곡가로 등장하여 역시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코르티잔 여인과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저 두 작품이 등장한 장르와 시대가 달라 비슷한 이야기를 상당히 다른 분위기로 표현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실제 뮤지컬에 등장했던 크리스티안의 루프탑 거처가 라보엠의 젊은 아티스트들이 거주하던 곳의 모습과 상당히 흡사해 보여 보는 내내 이런 유사점들을 발견하는 것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비슷해 보이는 장소지만 라보엠에서는 젊은 아티스트 친구 4명의 사중창이 펼쳐졌다면, 이번 물랑루즈에서는 시아(Sia)의 샹들리에(Chandelier)가 편곡되어 등장해 내 귀를 사로잡았다.
2001년 영화에 등장했던 노래들과 더불어 그 이후 이어지는 가장 최근의 팝송들까지 적절히 잘 믹스가 되어 담겨있다. 제목은 모르더라도 들어봤던 노래들이 거의 다라서 사실 주크박스 뮤지컬은 처음 관람해 봤는데 음악에서 오는 즐거움이 상당히 색달랐다. 그 많은 노래들을 메들리로 어찌나 잘 엮었는지 편곡하신 분께 그저 감탄의 박수만 보낼 뿐이다.
소위 피 터지는 티켓 구매 전쟁(일명 피켓)으로 쉽사리 무대에서 만나보기 어려운 인기 배우들이 있는데, 그중 한 명인 홍광호 배우님을 이번 작품에서 만나볼 수 있었던 건 실로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의 노래 실력이란 말해 뭐해지만, 이번엔 팝송들을 아주 맛깔나게 잘 소화해 주셔서 보는 내내 듣는 즐거움이 가득했다.
김지우 배우님 역시 완벽하게 사틴으로 분하여 매력을 한껏 발산했는데 워낙 늘씬하셔서 예쁘다 예쁘다 감탄사가 계속 나왔다는 건 안 비밀이다.
설날 당일 관람이었던 터라 공연이 끝나고 출연 배우들이 모두 무대에 올라와 소감도 발표하고 러키드로우도 진행했건만, 그 럭(luck)과는 거리가 먼 나는 그저 배우들과의 만남의 시간으로만 충분히 감사했다.
공연은 3월 5일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사실 다른 뮤지컬 작품들 대비 티켓 가격이 높아서 논란이 많았는데, 좋은 작품을 접할 수 있었던 건 감사하지만 갑작스레 티켓 가격 인플레이션을 야기시키는 건 달갑지 않다. 다른 곳에서도 슬그머니 따라 가격 인상을 감행할까 봐 염려스러운 건 사실이다. 물론 제작하는 입장에서 고려해야 하는 요건들이 많다는 건 충분히 안다. 그렇지만, 기껏 잘 이룩한 시장의 성장이 자신들만의 공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킨다면, 호응해 주는 대중들에게 비싼 티켓으로 보답하면 안 되지 않겠나.
좋은 공연이 더 많은 분들께 다가갈 수 있길 항상 바라는 한 사람으로서 무리한 가격 인상은 일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어쨌든, 이 물랑루즈 작품은 뮤지컬을 보겠다 한다면 한 번은 보시라고 강력히 추천한다. 오래지 않아 몽마르트르에 있다는 실제 물랑루즈를 찾아가 보고 싶단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