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한 지난한 과정에서 괴로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천년만년 갈 것만 같던 아이의 방학이 이제 끝자락에 이르렀다. 다음 주면 개학이라는 생각에 머릿속이 환하게 밝아오는 기분이라니... 이렇게까지 기나긴 방학이 버겁게 다가올 줄은 미처 몰랐었다. 내가 이상한 엄마인가..
방학 내내 뭐 대단한걸 한건 아니지만, 방과 후 수업이든 피아노 학원이든 하루에 한 가지 정도는 하는 것이 있어 한두 시간 집 밖을 드나들며 지냈다. 그래도 간간이 이벤트를 만들어 줘야 하니 아무것도 없는 날에는 여기저기 몇 군데 데리고 다녔는데, 어쩌다 보니 영화관에만 세 차례나 갔다. 죄다 아이가 보고 싶어 하는 애니메이션 들이었는데, 방학중인 고만고만한 아이들과 엄마들이 꽤나 많은 모습이었다.
아이에게는 영화관에 가는 일이 그저 신이 난다. 왜냐하면 엄마가 커다란 통에 들은 팝콘을 사주기 때문이다. 사실 그거 뭐 몸에 좋은 거라고 큰 걸 사주나 싶다가도 그래도 영화관에 가면 그게 맛이지 싶어 아이에게 맘껏 팝콘을 와그작댈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짭조름한 오리지널 팝콘과 캐러멜 팝콘 반반을 사면 그야말로 영화 보는 내내 입이 심심할 겨를이 없다.
한동안 코로나 때문에 영화관을 갈 수 없었던 때에는 영화관에서 팝콘과 각종 스낵류를 집으로 배달도 해줬었다. 그런 걸 누가 집으로 시킬까 싶었지만 어느 날 너무도 영화관에 가는 기분이라도 내보고 싶었던 우리 집도 팝콘과 핫도그, 그리고 음료를 집으로 배달시켜 영화를 봤더랬다.
집에만 갇혀 지내던 그때는 정말 그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 같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오고 나니 언제 적에 그랬나 싶고 까마득하게 느껴지지만 새삼 그때의 답답함을 떠올려보니 다시는 전염병이 창궐하지 않기만을 바라볼 따름이다.
꼬마가 네 살이었던 무렵에 처음 영화관에 데려가 애니메이션을 보여줬었는데, 그땐 그 깜깜한 환경이 낯설어 조금무서워하기도 했었다. 아이 들 거라 한 시간밖에 안 하는데도 그 한 시간이 참 길게 느껴졌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언제 적에 그랬냐는 듯 이제는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팝콘을 껴안고 어찌나 즐거워하는지 모른다. 그렇게 또 아이가 자랐구나 싶다.
이번 방학 동안에 본 애니메이션은 신비아파트, 장화 신은 고양이, 신비한 모리스 이렇게 세 가지였다. 그런데, 당연한(?) 얘기지만 사실 내게는 흥미로운 부분이 한 구석도 없는 것들이었다. 그래도 아이의 관심사에 함께 집중해 주고 공감해 주는 '좋은' 엄마 노릇을 해줘야 하는 건데, 세상에... 영화관에 돈 내고 들어가 꿀잠 자고 나오는 경험을 이번에 처음 해버린 것이다.
여태 영화관에서 잠들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당황스럽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했다. 잠이 들어야지 한 건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내려온 눈꺼풀을 그저 그렇게 내버려 뒀을 뿐이다.
처음이 어렵지 한 번 꿀잠을 자고 나니 다음번엔 쉬웠다. 내용이 다소 진부해진다 싶을 때 눈꺼풀은 자동으로 닫히고 말았다.(그래도 코는 안 골았으니 그게 어딘가) 아이가 다 끝나고 큰 목소리로 "엄마 잘 잤어?"라고 하는 바람에 조금 부끄러웠다는 거 밖에는......
원래 나는 신체 일부가 어디든 닿으면 잠들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관이 그렇게 잠자기 좋은 곳이라는 걸 이제야 새삼 알게 돼버렸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리 영화광은 아니다. 정말 보고 싶은 것이 생기면 가는 편이지 이것저것 영화라면 마다하지 않고 찾아보는 마니아는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집에서 함께 영화를 봐도 내가 정말 보고 싶던 영화가 아니고서는 하나를 틀어 놓고 시작부터 끝까지 집중해서 보는 경우는 사실 드물다. 그만큼 관심도가 아주 크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관심의 끈을 놓아 버리는 순간 너무도 자연스럽게 뇌는 잠의 마법을 내려 버린다.
영화광은 아닌 대신 나는 음악회나 공연에 있어서는 흥미도가 최고조가 된다. 그러니, 한 순간도 놓치면 안 된다는 일념으로 모든 정신과 감각이 반짝반짝 깨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간혹 연주회에 와서 꾸벅꾸벅 앞 좌석에 대고 인사하시는 분들을 보면 왜 비싼 티켓 사 와서 여기서 주무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게 사람이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야 하는 것을... 공연장을 찾은 애초의 마음은 어쨌든 그것을 보겠다는 것이지만, 맞닥뜨려 이것이 내 관심사가 아니구나를 깨닫는 순간 몸이 자동반응하여 눈꺼풀을 닫아버리는 것인데,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던 나는 지독히도 내 기준에서만 생각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게 사람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경험해 본 것만큼 밖에는 이해하지 못한다지 않나.
어쨌든 방학이니 아이에게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주겠다며 세 번이나 영화관을 찾은 노력은 조금 가상하게 봐줄 만하다. 그런데, 여지없이 꿀잠만 자고 나오다니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같이 보면서 공감해 주고 맞장구도 쳐주고 팝콘도 열심히 먹었어야 하는데...(생각해 보니 팝콘은 열심히 먹었다. 그래서 찾아온 식곤증일지도...)
아이가 자라며 내심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그 어떤 경우에라도 아이 생각에 우리 엄마 아빠는 나와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심어주고 싶은 것이다. 사춘기가 되면 자연스레 부모로부터 선을 긋는 경우가 허다하다는데 우리 아이는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어쩌면 욕심이겠지만..)
마음은 그러한데 매번 뜻하지 않게 엄마의 행동은 엇나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가끔 불평하는 소리를 들어보면 엄마는 내 말을 잘 안 들어준다고 한다. 나는 언제나 귀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조금만 더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려는 노력, 조금만 더 아이의 생각을 읽어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그리고 다음번 영화관에 들어갈 땐 진한 커피를 사서 들어가야겠다. 역시 카페인 수혈이 부족했다고 핑계를 대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