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드라마를 보면 악녀가 참 많이 등장하죠. 팜므파탈(femme fatale)이란 자신의 매력을 이용해 남성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아주 '치명적인 여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악녀들은 인류가 존재해 온 모든 시간에 있어왔지만요, 19세기나 되어서야 유럽 문학에 이런 팜므파탈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하네요.
카르멘! 많이 들어보시지 않았나요? 사실 제목보다는 서곡을 듣는 순간 아~ 이게 이 오페라에 나오는 음악이었어?라고 반응하실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요. 내친김에 일단 서곡을 듣고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작품은 1875년 3월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 극장에서 초연되었습니다. 워낙 성공적이었던 오페라였기에 이후 콘서트용 연주 모음곡집으로도 엮어져서 대단히 큰 호응을 얻었어요. 오케스트라 파트가 단순히 성악가들의 노래를 뒷받침하는 수준에 그치지 않고 교향악곡으로서의 완성도가 상당히 높아서 가능했던 성공이겠지요. 혹시 연주곡으로 먼저 접해보신 분들은 이게 오페라인줄 몰랐어요~ 하실지도 모르겠네요.
오페라 카르멘의 배경은 1820년 경의 스페인 남부 도시 세비야입니다. 앞서 이미 제가 '피가로의 결혼'과 '세비야의 이발사'에 관해 다뤄봤는데, 스페인 세비야가 왜 이렇게 오페라의 단골 배경으로 등장하는지 참 궁금해지네요. 아직 세비야의 매력을 직접 느껴보지 못했는데 어서 가보고 싶단 생각이 듭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순박하고 충직한 군인을 유혹해 결국 그를 파멸에 이르게끔 만드는 아주 나쁜 여자분, 카르멘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시작은 스페인 세비야의 담배 공장 앞 광장으로부터 출발해요. 이 광장의 경비 기병대 소속인 호세는 시골에 계시는 어머니가 정해준 순박한 시골처녀 미카엘라라는 아가씨와 약혼한 사이입니다. 정오를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담배 공장 여공들이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광장으로 쏟아져 나와요. 그중 뭇남성들의 관심과 시선을 독차지하는 매혹적인 집시 여인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문제의 주인공 카르멘입니다!
모든 남성들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해요. 아무리 추파를 던지고 들이대도 카르멘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죠. 왜냐하면 오직 그녀의 관심은 호세에게 가 있으니까요.
이럴 때 단순히 '마음'이 아니라 '심보'가 등장하죠. 왜 사람 심보란 게 유독 나에게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는 그 남자에게만 촉이 세워지는 걸까요? 쓸데없는 오기와 도전 의식 생기는 거 있잖아요. 이런 카르멘의 심보 버튼이 켜져서 그녀는 호세에게 살랑살랑 추파를 던집니다.
남성 편력으로는 세상 그 누구보다 닳고 닳은 카르멘의 무심한 척 훅 들어오는 유혹에 이 순진한 청년은 대책 없이 심쿵합니다. 자 그런데 이 대단한 여자분이 담배 공장에서 다른 여공과 다툼이 일어났는데, 상대의 얼굴에 칼로 상처를 내는 바람에 체포되는 일이 생겨요. 성질도 만만치 않은 거 같죠? 게다가 여기저기서 참 다방면으로 바쁘신 분인 게, 자신을 유치장으로 끌고 가기 위해 포박하는 호세를 그 와중에도 쉬지 않고 유혹합니다. 이미 그녀에게 혹~ 했는데 호세가 이를 무슨 수로 거스르겠어요. 게임은 이미 끝났죠.
카르멘은 한 가지 사악한 제안을 합니다.
"내가 당신을 밀치고 도망갈 테니 실수로 나를 놓치는 척해주세요~ 그렇게 해줄 거죠?"
이미 그녀에게 마음이 동한 호세는 반박의 여지가 없죠. 본의 아니게(?) 그녀를 놓친 죄로 호세는 두 달간 영창살이 신세가 됩니다. 호세가 아니라 호구가 되는 순간이네요.
호구는.. 아니 호세는 감옥에서 두 달 내내 카르멘 생각만 했나 봐요. 옆에 있음 정신 차리라며 등짝 스매싱 한대 날려주고 싶네요. 석방되어 나오자마자 다시 카르멘을 찾아가는데요, 역시나 그녀에게 흑심을 품은 호세의 상관과 이 여인네 하나 때문에 칼싸움까지 벌이는 하극상을 벌인 후 사실상 어쩔 수 없는 탈영을 하게 됩니다. (탈영은 군법 최고형 아니던가요?) 갈 곳 없어진 그는 결국 카르멘을 포함한 집시들로 구성된 밀수업자들의 무리와 함께 산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거 아시나요? 원래 어떤 목표점을 향해 달려갈 때 그 과정에서 도파민이 분비되어 희열을 느끼는 거라는 걸요. 그래서 정작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마치 풍선에 바람이 피시식 빠지듯 되려 허무함을 느껴본 경험 아마들 있으실 거예요. 카르멘이 지금 그런 상태가 되었나 봅니다.
열심히 꼬리 칠 땐 언제고 호세가 호구가 되고 나니 이제 재미를 다 잃은 거죠. 호세라는 존재는 카르멘에게 있어 이제 귀찮음 그 자체가 되었어요. 그녀는 호세에게 왜 어머니가 계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냐며 빈정대기까지 합니다. 이들은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 난 앙숙처럼 매일 다툼이 이어지지만, 호세는 그녀의 곁을 떠날 수가 없어요. 빈정대는 그녀에게 죽일 듯 덤벼들어 역정을 내보지만 카르멘은 콧방귀만 날리네요. 얼마나 얄미웠을까요.
이제 호세의 사랑은 집착으로 변질됐어요.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만든 그 여인, 오직 카르멘 하나만을 바라보고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밀수업자의 신세가 돼버렸는데, 아 정말 이 여인네를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했습니다. 호세의 애증은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이 와중에 카르멘의 치정은 여전히 그칠 날이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 산으로 호세의 약혼녀 미카엘라가 찾아와요. 그녀가 대단히 성능 좋은 GPS를 가지고 있었나 잠시 궁금해지지만 쓸데없는 궁금증은 뒤로 하고요, 여하튼 이 순진한 시골 처녀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자신의 약혼자를 보고 그를 여기서 구해내야겠단 생각을 하게 되죠. 그리고는 고향의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전하며 실로 발을 떼지 못하는 호세를 정말 마지못해 고향으로 발걸음 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허무하겠죠! 명색이 팜므파탈 막장 드라마인데~
자 그래서 이제 카르멘과 호세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걸까요~
카르멘을 잊지 못하는 남자들은 왜 이렇게도 많은 건지, 그녀를 못 잊어 다시 찾아온 투우사 에스카미요와 카르멘은 이제 연인관계에 놓여 있어요. 그와 함께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당당하게 세비야의 투우장 앞에 카르멘이 나타나는데.... 그녀를 다시 찾아온 호세가 오랜만에 카르멘을 마주 보고 물어본다는 질문이 고작 이렇습니다.
"정말로 에스카미요를 사랑하오?"
(카르멘은 최대한 표독스럽게 휙 돌아보며)
"그럼! 당연하지! 나는 에스카미요를 죽도록 사랑해! 그리고 너와의 관계는 이제 다 끝장났어! 넌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이글이글 호세의 마음속에 질투심이 끓어오릅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딱 한 가지 옵션만이 남았죠. 내가 가질 수 없다면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다고! 내 인생을 망쳐버린 이 나쁜 여자!!
호세는 카르멘의 등에 비수를 내리꽂습니다. 그리고 쓰러지는 카르멘을 안은채 호세는 절규하죠.
"당신이 나를 묶어두고 놓아주지 않았어! 당신이 그랬다고!! 흑흑~ 내가 이 여인을 죽였다니.. 내가 죽였어!!"
방금 저지른 자신의 끔찍한 범죄에 대해 그렇게라도 탓을 해야만 했겠죠. 참으로 어리석은 순진함과 교활한 악녀의 마음이 다 부질없다 느껴지는 엔딩입니다.
카르멘은 단순하게 보면 그저 순진한 한 남자를 파멸에 이르게 한 악녀입니다만, 시대적으로 봤을 때는 조금 색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랑에 있어 본인이 주도권을 가지고, 호감을 갖게 된 남자는 적극적으로 유혹하지만, 한 남자에게만 헌신하지는 않으며 또 자신에게 구애하는 남성들에게 흔들리지도 않아요. 카르멘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본능에 충실한 욕망의 표현, 자기가 주도하는 능동적 삶의 태도였던 거죠.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는 어찌 보면 카르멘은 여성 해방 주의라는 페미니즘적 시각으로도 해석하기도 한답니다. 이전 시대 여성들의 모습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부분이기 때문이죠. 그런 면에서 여기저기 떠도는 유랑자 집시로 등장하는 것이 좀 더 그녀의 자유로움을 부각해 줄 하나의 상징으로 잘 활용된 것 같아요.
세비야 광장에서 카르멘이 호세를 유혹하며 부르는 곡이 바로 '하바네라'라는 곡인데요, 이 곡은 종종 들어보실 기회가 많지 않았을까 싶어요. 심지어 피아노를 배웠던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피아노 명곡집'이라는 악보에서도 본 기억이 있으실 겁니다. 원 제목은 '사랑은 길들지 않은 새'라고 하는데요, 내용은 대략 이러합니다.
'사랑은 야생의 새와 같아서 아무도 길들일 수 없고, 한번 날아가버리면 다시 돌아오지도 않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당신을 선택할 거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면 그때는 조심해야 할 거야! 사랑은 느닷없이 찾아왔다가 날아가버릴 테니까!'
이 외에도 정말 주옥같은 음악들의 향연입니다만, 모두 들려드릴 수는 없으니 꼭 한 가지만 마지막으로 추천해 드리고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이 작품은 전체 4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2막과 3막 중간에 간주곡이 있거든요. 아마도 비제가 스토리의 분위기 전환을 위해 넣은 게 아닐까 싶은데, 이 아름다운 간주곡은 꼭 한번 들어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