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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뮤 Oct 15. 2023

오페라도 사랑도 애국도, 비바 베르디!

쥬세빼 베르디

이탈리아의 오페라를 논하면서 베르디를 빼고는 얘기가 안된다는 거 혹시 아시나요?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 사상 최대의 작곡가로 '오페라의 거인'이라 불릴 정도이죠. '벨 칸토' 오페라 양식을 계승하여 음악과 드라마의 완성도를 높이며 이탈리아 오페라에 있어 가장 이상적인 양식을 완성시킨 장본인이거든요.


1813년 이탈리아의 북부 도시인 부세토 근처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베르디는 어려서부터 상당히 음악에 재능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사실 집안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아 음악 교육에 충분한 서포트를 받을 수가 없었다고 해요. 근데 요즘말로 '될 놈 될'이라고 하던가요? 될 사람은 되는 법! 그의 재능을 알아본 부유한 상인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였던 '안토니오 바레치'의 눈에 띄어 그로부터 경제적 원을 받으며 음악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후에 베르디는 안토니오 바레치의 딸 마르게리타 바레치와 혼인하죠. 베르디를 아들처럼 아꼈던 바레치가 주저 없이 그를 사위로 맞이한 거예요. 결혼 후 이듬해에 첫 번째 딸을 얻었고요, 이어 바로 다음 해에 둘째 아들까지 얻었죠. 그렇게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잘 살아갈 줄 알았을 텐데, 둘째 아들을 맞이하던 그 해에 바로 첫째 딸이 세상을 떠났고, 그 이듬해에 둘째 아들마저 짧은 생을 마감했어요. 설상가상으로 같은 해에 아내마저도 뇌염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고작 스물여섯의 나이에 말이죠. 한꺼번에 가족을 모두 떠나보내다니, 베르디의 상심은 엄청났을 겁니다.


인생에 큰 고비를 만나 좌절을 겪으며 모든 것을 다 놔버린 채 방황하던 베르디가 슬픔을 딛고 일어나 다시 작곡을 시작해 내놓은 작품이 바로 오페라 '나부코'였어요. 베르디가 쓴 오페라는 총 26편인데 초기작인 나부코의 성공을 계기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굳건히 하게 되었지요.


베르디가 그의 아내를 무척 많이 사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그가 한평생 세상 떠난 아내만을 그리워하며 수절했더라면 좀 더 애절한 스토리 텔링이 가능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시간은 흐르고 산 사람은 또 계속해서 삶을 살아가야 하니까요. 오페라 나부코가 그에게 성공만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공과 함께 새로운 사랑도 배달해 주었죠.



과거는 묻지 않겠어요!


베르디는 나부코 작품을 통해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바로 작품의 여 주인공을 맡았던 오페라 가수 '쥬세피나 스트레포니'였어요. 그녀는 당시 보기 드문 아주 역량이 출중한 소프라노였다고 해요. 당대 활동하던 주요 오페라 작곡가들의 모든 작품에는 거의 다 출연할 만큼 능력을 인정받았고 인기도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쉬지 않고 무대에 섰기 때문에 나중에는 목에 무리가 가서 일찍 은퇴를 고려해야 할 정도였다고 해요.


그런데! 그녀에게는 다소 자랑스럽지 않은 꼬리표가 붙어 있었으니, 바로 미혼모였다는 사실입니다. 요즘 세상에야 누가 촌스럽게 과거로 꼬투리 잡을까 싶습니다만, 남녀 관계에 있어 어쨌든 여전히 참 미묘하게 어려운 부분이죠. 게다가 솔직히 미혼모란 사실이 쉬이 용납되는 상황은 아니니 말이에요.


스트레포니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어서 장녀로서 가정의 경제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고 합니다. 잘 나가는 소프라노 가수가 되었지만 아마도 그녀의 사생활은 그다지 평범하지는 않았던가 봐요. 베르디를 만나기 전 두어 번의 첩 생활을 했었다고 하는데, 사실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출산만 세 번이 있었다고 합니다. 실은 한 번 더 있다는 썰이 있던데 명확하게 확인된 바는 없다고 하네요. 이렇게 당당하게 미혼모 타이틀을 달고 베르디와 연인 관계에 놓이게 되었으니, 주변의 구설이 말도 못 했던 건 당연하겠죠.



이것은 베르디 집안의 큰 그림이었던가?


1850년대 베르디가 활동하던 시대에는요, 이탈리아의 정치 현실이 아주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던 때였습니다. 국토가 4등분으로 나뉘어 있었죠. 비토리에마누엘레 2세가 군주로 있던 사르데냐 왕국, 부르봉 계의 국왕 페르디난도 2세가 지배하던 양 시칠리아 왕국, 로마에 인접해 있던 교황령, 그리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 제국이 지배하던 롬바르디-베네치아 왕국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이런 와중에 유럽의 다른 여러 국가에서는 왕정에 맞서는 진보 사상이 널리 퍼져나가고 있던 시절이었더랍니다.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이 통일 국가를 이루길 염원하면서 국왕으로 추대하고 싶어 하던 인물은 바로 사르데냐 왕국의 왕이었던 '비토리에마누엘레 2세'였다고 해요. 이탈리아어로 Vittorio Emmanuelle Re D'italia(=이탈리아의 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라고 읽는데요, 이 첫 글자들을 모두 가져오면 VERDI, 즉, 베르디가 되는 거죠. 그래서 당시 애국 운동가들이 함부로 새로운 왕의 추대를 언급하면 잡혀가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고 모두  Viva Verdi(비바 베르디), 베르디 만세!라고 얘기했답니다. 결과적으로는 베르디가 이탈리아 독립의 상징이 되어서 초대 국회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치인으로도 활약했다고 하네요.


베르디가 음악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작업을 많이 했던 터라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과 찬사를 받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뭔가 이름 때문에 국회의원까지 얻어걸린 것 같은 건 기분 탓일 거예요. 자고로 예부터 이름을 잘 써야 팔자가 좋다고 하잖습니까. 베르디 거 참 좋은 이름이었네요!



베르디 역시도 너무도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겼어요.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대중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을 꼽아보라면 단연코 세 작품이 언급되는데요, 바로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 이렇게 3 총사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사랑받는 작품인 '라 트라비아타'에 대해 이야기 나눠볼까 하는데요, 그럼 함께 다음장으로 가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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