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 순간 섬세한 감정에 충실했던 예술가
자코모 푸치니
앞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오늘날까지도 사랑받는 훌륭한 오페라 작품들을 작곡한 작곡가들의 이야기를 나눴잖아요. 그런데, 왜 근대에는 화제가 될 만큼의 대단한 오페라 작품들이 다양하게 등장하지 않은 건지 혹시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물론 현대에도 다양한 창작 오페라들이 탄생하고는 있습니다만 솔직히 우리가 지속적으로 언급하는 클래식 오페라들에 비하면 관심을 못 받고 있는 게 사실이잖아요.
이제부터 아마도 오페라라는 장르로서는 가장 최후의 정점을 찍은 작곡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한 푸치니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합니다.
푸치니는 1858년 토스카나 지방의 루카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요, 시대적으로 19세기 중반에 출생했으니 그의 활동시기는 거의 19세기 말로부터 20세기 초까지였어요. 푸치니의 전체 12개 오페라 작품 중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마지막 작품이 '투란도트'였는데 그가 이미 60대에 접어 들어서 작곡하기 시작한 작품이었거든요.
이 즈음에는 오페라라는 예술 장르가 사실상 쇠퇴기로 접어들던 시기였죠. 왜냐하면, 그 이전에는 없었던 정말 새롭고 흥미로운 '영화'라는 강력한 오락물이 경쟁상대로 세상에 등장했기 때문이었어요. 사실 푸치니의 음악을 듣다 보면 아주 오래된 옛날 영화에 배경 음악으로 등장하던 음악들과 비슷한 느낌이란 생각을 하시는 경우가 있는데, 시대적으로 이런 연결 고리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푸치니의 음악이 다양한 영화 음악에도 영향을 줬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푸치니는 5대에 걸쳐 음악인들을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났어요. 그런데 어린 시절 특별히 음악적으로 재능을 보이지도 않았고 학교 성적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가 여섯 살밖에 안 됐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대가족이었던 푸치니의 집안 형편은 사실 많이 어려웠다고 해요. 그러나, 푸치니는 음악가의 길을 가야 할 운명을 타고났던 걸까요? 음악원에서 오르간을 가르쳤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훗날 성가대 합창 지휘와 오르간 연주 직무를 맡게끔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고 해요.
그가 중심을 잡고 음악의 길로 가게끔 한 배경에는 그의 어머니 알비나의 공이 상당히 컸어요. 학교에서 거의 잘릴 위기에 처한 아들을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죽은 남편의 제자였던 카를로 안젤로니에게 아들을 가르치도록 맡겼는데, 안젤로니는 당시 여느 이탈리아인들처럼 대단한 오페라 팬이었고, 16살에 그의 문하로 들어간 푸치니도 그의 영향을 받아 조금씩 오페라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17살 되던 해에 안젤로니 선생의 권유로 친구들과 함께 피사(Pisa)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를 보게 되었다죠. 이 작품을 보기 위해 피사까지 친구들과 8시간을 걸어갔다고 하는데, 관람 후에 너무 감명을 받아 자신도 오페라 작곡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답니다. 원래 맛집에 두세 시간 줄을 선 후에 음식을 영접하면 그 맛은 그야말로 천상의 맛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오페라를 보기 위해 8시간이나 걸어간 후에 맞이한 작품의 감동은 정말 엄청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더구나 베르디인걸요. 요즘말로 '말모 말모(말해 뭐 해)'였겠죠.
매 순간의 감정에 충실했던 그 남자
푸치니는 이렇게 멋진 작품들을 남긴 대가입니다만, 감수성 넘치는 예술가의 특징이라고 살짝 변명해봐야 할까요? 그는 좀 바람기가 있었던가봐요. 사실 여러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것 자체를 '바람'이라고 정의합니다만, 왜 또 바람피우시는 분들 입장에선 이렇게 얘기한다면서요?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부부의 세계 명대사였죠) 그저 매 순간 찾아오는 사랑의 감정을 무시하지 못했던 그들의 섬세한 감수성을 탓할 수밖에요.
실제 푸치니 주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는 굉장히 섬세한 감정의 소유자였고 시시때때로 혼자 멍 때리며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의 세계에 혼자 빠져있기를 잘했다고 해요. 그야말로 하늘에 별을 보면서도 느닷없이 눈물을 흘리는 유리알 감성의 소유자였던 거죠.
사실 푸치니의 아내와 얽힌 뒷말들이 꽤 많은데요, 그의 아내도 실은 원래 친구의 아내였다지요. 그렇게 친구의 아내를 빼앗아 결혼했는데 말입니다, 결혼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여성들과의 풍문은 잦아들지 않았다고 해요. 어쩔 수 없는 상황적 이유도 있었겠습니다만, 그의 아내였던 엘비라는 대단한 의부증 환자였다고 해요. 그래서 푸치니에 대한 집착이 말도 못 했다고 하죠. 그렇게 그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히 커서 많이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알려진 또 하나의 비화가 있는데요, 푸치니의 개인 비서역할을 하던 만프레디라는 하녀가 있었데요. 그런데, 푸치니와 그녀의 사이를 의심한 아내 엘비라가 공개적으로 그들의 사이를 비방하고, 아마도 만프레디를 상당히 괴롭혔던가봐요. 만프레디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이를 너무도 마음 아파하던 푸치니가 이러한 상황과 캐릭터적 특징을 투란도트 속 '류'라는 등장인물에 투영시켰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삶의 어려운 순간도 작품으로 승화시키던 진정한 예술인이죠.
오늘날까지 재해석되고 있는 그의 명작들의 향연
푸치니는 사실 조금 늦은 나이였던 38세에 오페라 '마농 레스코'를 통해 오페라 작곡가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어요. 그 이후에 그야말로 빛나는 푸치니의 전성기가 찾아오죠. 1896년 '라 보엠'을 발표하면서부터 그의 명작 시대가 시작되는데요, 라보엠에 이어 1900년에 발표한 '토스카' 그리고 1904년에 발표한 '나비 부인'까지 연이어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됩니다.
푸치니의 오페라는 오늘날 새로운 감각으로 재해석된 뮤지컬로도 만나볼 수 있어요. '라 보엠' 같은 경우는 뮤지컬 '렌트'로 재탄생되었고요, '나비부인'은 '미스 사이공'으로 재해석되었죠. 같은 내용이지만 오페라와 뮤지컬을 비교해 보는 재미도 상당히 쏠쏠하답니다.
푸치니의 음악은 그야말로 너무 아름다워서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성악가들의 파트를 모두 제거하고 음악만 들어봐도 그 자체로 충분히 마음을 일렁이게 하는 감동이 가득해요. 이렇게 아름다움 가득한 그의 작품 중 딱 하나만 고르라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만, 그중에서도 '나비부인'에 대해 이야기 나눠보려고 합니다. 그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일본을 고스란히 음악에 담아낸 천재적 작품, 함께 만나보러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