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와 그다지 친숙하지 않더라도 사실 많은 분들이 '라 트라비아타'라는 제목은 어디선가 한 번쯤 접해보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못 들어보셨다고요? 그럼 혹시 '춘희'라고 들어보신 적은 있으신가요? 한국에선 오래전에 '라 트라비아타'를 '춘희'라고 했었죠. 그 이유는 이 작품의 원작이 프랑스의 작가 뒤마 피스의 소설 '동백꽃 여인'인데요,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제목을 춘희椿姬라고 번역하는 바람에 국내에도 그렇게 소개가 되었다는 것 같습니다. 한자 '椿(춘)'자가 일본어에서는 동백나무를 의미한다고 하네요.
이 작품은 1853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 초연되었어요. '라 트라비아타(La Traviata)'란 이탈리아어로 '타락한 여인'을 의미합니다. 제목이 외국어인 경우 무슨 뜻인 줄을 모르니 뭔가 대단한 말인가 싶을 때도 있는데, 의미를 알고 보면 의외의 뜻을 가진 경우도 참 많은 거 같아요 그렇죠?
이 작품의 내용을 살펴보려면 우선 '코르티잔'에 대해 알아야 해요. 코르티잔은 과거 유럽에 존재했던 귀족이나 왕족과 같은 부자 상류층을 상대하는 고급 매춘부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확히는 단순 매춘부와는 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귀족들이 아내의 암묵적 동의하에 나름 '자랑스럽게' 대동하고 다니던공개 애인이었다고 합니다.
사실 코르티잔과의 관계는 스폰서와 애인으로서의 '계약적 관계'였기 때문에, 실제 스폰서가 존재하는 동안에는 코르티잔들도 엄청나게 부유하고 화려한 삶을 살았다고 해요. 다만 슬프게도 코르티잔으로서의 수명은 그다지 길지 않았기 때문에 20대 중반만 되어도 소위 은퇴를 해야만 했다죠. 그렇게 계약 관계가 종료되면 더는 경제적 지원을 얻지 못해 그들의 삶은 어려움에 빠지는 게 다반사였다고 합니다.
그럼 스폰서를 받는 동안 딴 주머니라도 좀 두둑이 챙겨두면 되지 않느냐 생각하고 계시죠? 그럴 수가 없었답니다. 왜냐하면, 파리 사교계에 엄청나게 사치스럽고 화려한 파티를 주관하는 것이 바로 코르티잔들이었는데, 파티 준비를 위해 어마어마한 금액을 사용한 후 스폰서에게 청구하는 '후불 정산제' 시스템이었다고 해요. 프랑스 사람들 대단히 실리적이고 정확하네요?
사실 이 작품의 원작을 쓴 '뒤마 피스'는요, 삼총사와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뒤마 페르'의 아들입니다. 본인보다 아버지가 엄청나게 유명한 작가였어요. 뒤마 피스가 사실 자신의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자전적 소설인 '동백꽃 여인'을 써낸 건데요,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실제 뒤마 피스의 연인이자 파리 사교계에서 대단히 인기 있던 코르티잔, '마리 뒤플래시'라는 여인이랍니다.
마리 뒤플래시는 고작 열여섯 살이던 당시 한 젊은 귀족의 눈에 띄어 코르티잔 계에 발을 들이게 됐는데요, 미모뿐만 아니라 상당히 스마트했던 그녀는 배우는 것마다 지식 습득이 빠르고 예술적 자질도 뛰어났었다고 해요. 피아노와 무용뿐만 아니라 방대한 양의 책도 탐독했다고 전해집니다.
다만, 그녀는 실제 폐병을 앓고 있던 환자였는데, 뒤마 피스가 그 사실을 알고 그녀를 극진히 보살폈다고 하죠. 뒤마 피스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어요. 그러나, 그녀가 사교계에서 대단한 인기인으로 부각되면서 부자들로부터 엄청난 양의 선물 공세를 받기 시작했다는데, 받았던 선물의 가치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던 대다, 그녀가 1년간 소비했던 금액이 무려 10만 프랑(현재 가치 16억 정도)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저는 한 번도 재벌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이런 소비 규모가 상상이 가질 않네요.
뒤마 피스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그만큼의 경제적 지원을 해줄 능력은 되지 못했고요, 동시에 연인이 사교계에서 다른 남성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기가 쉽지 않았을 테죠. 결국 그는 마리 뒤플래시를 떠났지만 그 후로도 오래도록 그녀를 잊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결국 자전적 소설 속에서 그녀를 다시 그려낸 거죠.
라 트라비아타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사전 설명이 길었어요. 왜냐면, 바로 이 작품 속 주인공인 '비올레타'가 폐병을 앓고 있는 코르티잔이기 때문입니다. 실제 뒤마 피스의 연인이었던 마리 뒤플래시가 모델이거든요. 그럼 이제부터 전반의 스토리를 한번 살펴보도록 할까요?
이곳은 비올레타 저택의 살롱입니다. 파리 사교계의 꽃인 비올레타의 집에서 파티가 열린 상황이죠. 손님 중에 가스통 자작이 알프레도라는 자신의 친구를 데리고 왔는데요, 전에 알프레도가 파티에서 비올레타를 보고 한눈에 반해 짝사랑 중이라는 귀띔을 해줍니다. 파티가 진행되는 가운데 갑자기 시작된 기침으로 비올레타가 휘청댑니다. 그래서 잠시 진정이 될 때까지 휴식을 취하겠다며 혼자 방에 남아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비올레타를 찾아온 알프레도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합니다.
"처음부터 당신을 보는 순간.. 사랑에 빠졌어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비올레타는 반신반의하며)
"저를요? 그럴 리가요.. 그저 단순한 호기심이었을 거예요.. 저는 당신이 사랑할만한 그런 여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끈질기게 진심을 전하는 알프레도를 보며 비올레타는 살짝 마음이 움직이긴 하죠. 알프레도가 화병에 꽃을 하나 뽑아 비올레타에게 주면서 얘기합니다. 이 꽃이 시들 때쯤 다시 돌아오겠다고... 네, 바로 다음날 다시 오겠단 뜻이에요.
여기서 이 꽃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자면요, 원작이 동백꽃 아가씨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부분이 여기와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다시금 마리 뒤플래시를 소환해 보면, 그녀는 늘 화병에 하얀색 동백꽃을 꽂아 두었다고 해요. 그런데 어느 특정 시점의 며칠 동안만은 빨간색 동백꽃을 꽂아두었다는 겁니다. 왜 그랬는지 짐작이 가시나요? 네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여자들은 매월 달거리, 즉, 월경을 하잖아요. 대략 일주일 정도의 기간은 빨간 동백꽃을 통해'I am not available!'이란 메시지를 전했던 거랍니다.
결국 알프레도와 비올레타는 연인이 되었어요. 그리고, 비올레타는 사교계 생활을 정리합니다. 둘은 파리 외곽에 위치한 비올레타의 시골 저택에서 몇 달을 함께 보냈어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코르티잔이 자체적으로 보유한 자산이 많은 사람들은 아니었잖아요. 그래서 비올레타는 자신이 가진 패물 등을 내다 팔면서 그들의 생활비를 조달하고 있었던 거죠. 이런 사정도 모르고 그저 행복하다는 알프레도는 상당히 철없는 남자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자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날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이 비올레타를 찾아옵니다. 딸이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오라비가 코르티잔과 사귀고 있다는 소문 때문에 파혼을 당할뻔했다며 아들과 헤어져달라는 부탁을 간곡히 해요. 물론 우리나라 아침 드라마 같았다면 김치 싸대기가 한 번쯤 날아갔을 상황입니다만, 알프레도의 아버지는 아주 점잖게 이야기를 나누죠. 코르티잔이라고 선입견을 가졌던 비올레타를 직접 만나보니 그녀가 생각보다 너무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런 대화를 나누는 상황에 대한 미안한 마음마저 갖게 되거든요.
알프레도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비올레타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죠. 헤어지라니요. 그녀는 눈물로 호소해 보지만 결국은 제르몽에게 설득을 당하고 맙니다. 비올레타는 알프레도에게 편지를 남기고 파리로 떠나요. 잠시 후 편지를 전달받은 알프레도는 헤어지자는 그녀의 말에 충격을 받고요, 말리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분노에 차 서둘러 파리를 향해 떠납니다.
비올레타의 친구인 플로라의 집 파티장입니다. 다시금 호사가들이 모여 파티를 즐기는 가운데, 알프레도와 비올레타가 헤어졌다는 이야기들로 즐거운 가십이 펼쳐지는 중이죠. 파티가 무르익어 가는 가운데 비올레타는 다시금 이전의 스폰서였던 듀폴 남작과 함께 파티장에 등장합니다. 그리고는 알프레도가 겜블링 테이블에 앉아 있는 걸 발견하죠. 듀폴 남작 역시 그가 눈엣 가시였기에 알프레도의 도전에 적대감을 품고 테이블에 조인하여 함께 겜블링을 합니다. 그런데, 알프레도에게 꽤 많은 돈을 잃고 말아요.
모두가 식사를 위해 다이닝 룸으로 이동한 후 비올레타는 조용히 알프레도에게 파티장을 떠나라고 이야기하죠. 듀폴 남작이 화가 나서 그에게 혹시 결투라도 신청하게 될까 봐 무척 불안했거든요. 그러나 이런 비올레타의 속마음은 모르고 다른 남자와 파티를 즐기기 위해 자신에게 가라는 줄로 오해하고는 엄청나게 화가 나죠. 그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들여 그 앞에서 비올레타에게 망신을 줍니다.
"다들 이 여자를 아시오? 돈으로 사랑을 사고 아무 남자 하고나 놀아나는 싸구려 여인!! 그동안 나를 사랑해 주는 척 연기해 줘서 무척 고맙구려! 자 이거나 받으시오!!!"
그리고는 겜블링에서 딴 돈을 비올레타에게 모두 던져 버립니다.
이런 소동이 벌어진 때에 알프레도의 아버지 제르몽이 파티장에 찾아오고 아들의 무례함을 목격하고는 이를 무척 나무랍니다. 멱살 잡고 끌고 가 등짝 스매싱을 힘껏 날려줬을지도 모르겠네요.
시간이 흐르고 비올레타는 쓸쓸하게 침대에 누워 꺼져가는 생명을 간신히 붙들고 있어요. 그녀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거죠. 침대에 누워 제르몽이 보낸 편지를 읽어 내립니다. 알프레도와 듀폴 남작이 결투를 벌였는데 남작은 가벼운 부상만 입었다는 소식과, 제르몽 자신이 아들에게비올레타가 우리 가족을 위해 희생한 것임을 알려줬고 되도록 빨리 찾아가 용서를 빌도록 보낼 예정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그녀의 눈앞에 드디어 알프레도가 찾아왔어요. 그녀는 잠시 기운이 솟고 몸이 다 낫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집니다. 이제 다 나은 것 같다고, 완전히 괜찮아진 것 같다며 힘겹게 몇 걸음을 떼고는 쓰러지죠. 그녀는 알프레도의 품에 안겨 결국 생을 마감합니다.
너무 쓸쓸한 결말이죠. 스토리 라인 자체는 복잡하게 꼬인 곳이 전혀 없어요. 그러나 베르디가 이 작품 속에 담아낸 음악은 그야말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답니다. 함께 몰입하여 온전히 비올레타의 감정을 느껴가다 보면 마지막엔 울컥 눈물이 차오르게 되죠.
'라 트라비아타'의 시작과 함께 그야말로 지구인 모두가 아는 노래가 등장하는데요, 바로 '축배의 노래'로 알려진 곡입니다. 이 노래는 듣는 순간 바로 RG RG 스위치가 켜지실 거예요. (아니라면 정말 화성에서 오신 걸 지도...)
이 작품은 주인공 소프라노에게 가장 큰 비중이 주어져서 전체의 극을 리드하고 있는데요, 마리아 칼라스 이후로는 많은 소프라노들이 비올레타 역 맡기를 꺼렸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데다 마리아 칼라스만큼 소화해 낼 수 있을지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던 거겠죠. 한 곡을 더 추천해 드리자면 초반에 등장하는 'E strano(이상해..)'라는 비올레타의 아리아예요. 알프레도의 고백을 듣고도 정말 진짜 사랑인 걸까 의심하는 마음에 자꾸만 밀어내 보지만 어쩔 수 없이 그에게 마음이 조금씩 열려가는 비올레타의 내적 갈등을 그려낸 노래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