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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마뮤 Mar 08. 2021

겪어보니 알게된 그 마음

지난해 그야말로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박혀 있던 여름 한복판 어느 날, 왠지 어질어질하고 속이 울렁거리며 소화가 잘 안된다는 느낌이 있었다. 워낙 예민한 성격이다 보니 조금만 신경을 써도 체하거나 위장 탈이 잘 나는지라 단순히 소화가 안 되는 느낌보다 조금 더 나아가 불편함을 느끼게 되면 바로 알아차리곤 한다. 집에 있는 소화제만으로는 해결이 안 될 것 같아 동네 내과에 방문해 처방약을 받아왔지만, 쉽사리 울렁거리는 듯한 느낌이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날까지 지속되는 증상에 몸살인가 싶어 다시 내원하여 영양제 링거를 맞고 집으로 왔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 건지 속은 계속 울렁거리고 어지러운 증상이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날 늦은 밤에 터져 버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토악질에 쉴 새 없이 화장실로 뛰어야 했고, 화장실 앞에 주저앉아 계속되는 구역질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지경이었다. 뭔가 단단히 탈이 났구나 싶어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순간 아주 오래전 그때가 생각이 났다.






갑자기 아버지가 쉴 새 없이 토악질을 하셨다. 도대체 뭘 잘못 잡수셔서 저렇게까지 탈이 났을까 이렇게 단순하게만 생각을 하며 점차 나아지려니 했지만, 아버지는 끊임없는 토악질과 더불어 어지럼증을 호소하셨고 이게 단순히 소화가 안돼서 생긴 문제가 아니구나 싶어 얼른 응급실로 갈 채비를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뭐 하나 모르고 철없던 나의 20대 시절, 10년이 넘는 세월을 투병 중에 있으신 엄마를 바라보는 것 하나만으로도 마음은 늘 충분히 무겁고 힘들었다. 나의 그 마음이 아프신 당사자의 절반만치도 안 되는 것이었을 텐데, 그저 내게 있어 우주와도 같았던 우리 엄마의 투병생활이 나에겐 언제나 불안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뭔가 탈이 나서 힘드신 아버지의 모습이 걱정스럽고 놀랍기보다는 '이 와중에 왜 아버지까지 아프시냐'하는 이기적이기 짝이 없는 못된 마음이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집에서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로 아버지를 모시고 갔다. 아버지 증상에 내려진 진단은 '이석증'이었다. 듣도 보도 못했던 이석증이란 것은, 귓속의 전정기관에서 균형을 담당하는 작은 '돌멩이'가 제 위치에 있지 않고 빠져나와 평형감각에 이상이 생겨 극심한 어지럼증을 유발하고 그와 더불어 구역질이 발생하는 것이란다.

다행히 돌멩이가 제 위치에 돌아가도록 조치를 취하면 곧 괜찮아지는 문제였고, 구역질을 잠재우는 링거 약을 맞으시며 증상은 잦아들었다.


그때 내 모습을 돌이켜보면 아버지께 너무 죄송하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엄마가 아프시니 사실상 아버지는 내게 심정적으로 비빌 언덕이었던 건데, 그 언덕마저 탈이 났다 하니 걱정보다는 왜 나한테 이런 상황이 생기는 가에 대한 '짜증'만 가득했던 것 같다. 응급실 침대에 누워 계시는 아버지께도 투덜거리며 짜증을 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렇게 오로지 내 생각만 가득했던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자라는 내내 아버지는 늘 '바쁜 사람'이었다. 사실 우리 때 아버지들의 삶이 다 그러했지 싶다. 언제나 아버지는 밖에서 바쁘신 분이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이 적다 보니 아무래도 엄마에게 느끼는 애착보다는 아버지에게는 다소 거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언제나 내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도 엄마였었고, 힘든 마음에 위로가 되는 대상도 엄마였었다. 그렇게 알 수 없는 벽이 아버지와의 사이에는 늘 서 있었던 것 같다.


오랜 기간 투병 끝에 엄마가 돌아가신 후, 집에 덩그러니 아버지와 나 두 사람만 남은 상황은 그렇게도 어색하고 이상했다. 뭔가 대화를 나눠야 할 상대가 아버지밖에 안 계신데, 알 수 없는 어색함이 늘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버지랑 단 둘이 밥을 먹는 것도 어색하고, 가끔씩 맛있는 걸 사주겠다며 데리고 나가주시는 아버지와 마주 앉은 식당에서도 소개팅으로 처음 만난 남자들과 마주 앉은 것보다도 더 어색한 기운을 느끼곤 했다. 엄마의 부재가 만들어 내는 허전함이 상당했지만, 그 나이껏 살아오며 아버지랑 그리 친근히 마주해본 일이 상대적으로 많지 않았기에 어찌보면 너무 당연한 증상이었다. 그래도 사람은 다 적응하기 마련이라 그렇게 아버지와 둘이 지내는 시간이 익숙해져 갔고, 점점 허물없이 이런저런 수다도 잘 늘어놓게 되어갔다. 


예전에는 전적으로 엄마 편에 서서 아버지를 바라보다 보니, 엄마가 섭섭해하시는 부분이 무엇인지가 먼저 보이고,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항상 엄마 편에 서 있곤 했다. 그래서 늘 아버지께는 뭔지 정확히 정의할 수도 없는 어떤 불만의 덩어리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아버지와 단 둘이 생활을 해나가다 보니 이제는 아버지의 입장도 조금씩 눈에 들어오고 그 마음도 헤아릴 수 있는 시간들이 되었다. 어느 순간 바라보니, 그 오랜 세월 아내의 투병기간을 묵묵히 옆자리에서 함께해온 아버지의 노고도 보이게 되었고 그 마음이 딱하고 안쓰럽단 생각도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혼자 남아 그 어려운 마음을 다 견디고 묵묵히 지금도 자신의 자리를 지켜나가고 계신 아버지가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새벽 4시..

멈추지 않는 토악질과 어지럼증. 그거구나. 그때 울 아버지 응급실 가게 만들었던 그 문제가 나한테도 생긴 거구나 싶었다. 병원에 가야 했다. 이른 새벽 비가 엄청나게 내리고 있었다. 곤히 자고 있는 아이를 어찌할 수가 없으니 그 꼭두새벽에 염치 불고하고 아버지께 전화를 했다.


"아부지.. 제가 좀 아파서 지금 응급실을 가야겠는데, 애가 자고 있으니 집에 좀 와주세요.."


새벽부터 연로한 아버지를 놀라게 해 드리고 싶진 않았으나 내게는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와 주셨고, 나는 남편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타서도 쉬지 않고 비닐봉지에 얼굴을 박고 있어야 했다. 다행히 종합병원이 10분 거리에 있어 금방 병원에 당도했지만, 아무도 없는 새벽에도 응급실에 들어가기까지 열도 재고 문진표도 적자니 그 시간이 한없이 오랜 시간처럼 느껴졌다.


증상을 듣더니 역시나 예상대로 '이석증'이 의심된다고 했다. 팔에 링거를 꼽고 두 시간 가까이 응급실에 앉아 기다렸다가 겨우 이비인후과 진찰을 받을 수 있었는데,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해보시더니 '전정 기관염'이 의심된단다. 이건 또 뭔가 싶었다. 사실 증상은 이석증과 거의 동일하지만 전정 기관염은 말 그대로 전정기관 내 어떤 바이러스의 침투 등으로 인해 염증이 발생해 평형기관에 발란스가 깨져 어지럼증을 유발하는 것이란다. 이 증상은 완벽히 나아질 수는 없지만 점차 내 몸이 어느 정도의 어지럼증에 적응이 되도록 연습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머릿속으로 드는 생각은 한 가지뿐이었다.

'이건 또 무슨.... 나 불치병 걸린 거니....'


적절한 조치 후 구역질은 잦아들은지라, 약을 처방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부터 나는 꼼짝도 못 하고 집에 누워있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조금 나아졌나 싶어 돌아다녀 보다가 그야말로 세상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어지럼증으로 주저앉기도 했고, 그로 인해 소화기간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느껴지는 불편감은 이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매주 외래진료를 통해 점검을 받았는데, 다행히 증상이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라며 나아지길 지켜보자 하는 게 전부였다. 는 죽을 듯 힘이 든데 그게 최악은 아니라니 도대체 이보다 더 제대로 아프다면 어느 정도까지 괴로울지 상상조차 힘들었다.


누워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그즈음 출시되어 한창 홍보 중이던 '오디오북'을 접하게 되어 매일 누군가 읽어주는 책을 듣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어느 순간 이제는 정말 괜찮은 거 같은데 하는 날이 왔고, 다행히도 한 달여간의 와병 생활은 점차 정리가 되어갔다. 리고 평생 안고 가야 할 줄 알았던 어지럼증도 점차 다 사라져 갔다.






얼마 전 아버지가 그간 추적 검사를 해오던 갑상선에 결절이 좀 커져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라는 소견서를 받으셨단다. 사실 우리 집은 엄마의 투병으로 인해 웬만한 정도의 병 이야기로는 크게 놀라지 않기는 한다. 그런데 어쨌든 아버지는 본인이 큰 병원의 문턱을 넘어가야 한단 소리에 내심 좀 놀라셨던 모양이다.


"요즘 며칠 계속 꿈에 네 엄마도 보이고, 먼저 저 세상 간 사람들이 보인다.."

"아우 아부지, 갑상선은 검사하고 일찍 문제를 발견하면 그거 치료하는 거 큰 일도 아니래요. 걱정 마세요.."


이렇게 말씀드려봤지만, 그래도 뭔지 모르게 마음이 착잡한 건 사실이었다. 당신 혼자서 가도 괜찮다며 오지 말라 하시지만 그래도 병원을 드나들 때 보호자가 함께 해주는 게 심정적으로나마 큰 의지가 되는 걸 알기에 몇 번의 방문에 함께 동행해 드렸다. 다니며 보니 우리 아버지도 이제 정말 노인이 다 되셨구나 싶은 게 맘이 짠했다. 조금은 걱정스러운 맘으로 시작했으나 검사를 받아보니 다행히도 큰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감사할 따름이다.






자식을 낳기 전에는 정말 몰랐다. 아무리 부모님 은혜 감사합니다를 매년 어버이날 노래하고 꽃 만들어드리고 했어도, 부모의 마음이란 게 지금 내가 내 아이를 보며 느끼는 "이런 기분"이라는 사실을 결코 알 수 없었다. 이 마음은 사실 언어로 어떻게 정의 내리기도 참 어려운 감정인 듯하다. 요즘은 선택적으로 싱글의 삶을 살기도 하고 자식을 낳지 않는 경우도 많지만, 사람이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봐야 철이 든다는 그 말의 뜻은 뭔지 이제 정말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내 자식을 통해 인생에서 그 누구도 말로는 가르쳐 줄 수 없는 그 너머의 엄청난 깨달음들을 얻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세월은 가고 우리는 모두 나이가 들어간다. 중년의 무거운 나이를 짊어지고 노년의 아버지를 바라보며 그저 건강히 좀 더 오래도록 곁에 계셔주시기만을 바랄 뿐이건만.. 자꾸 나중이라는 시간을 더 벌어보려 하지 말고 지금 바로 이 순간에 한 번이라도 아버지께 다가가는 노력을 해야겠다 다짐하게 된다. 오늘은 삼겹살 사들고 아버지 댁 가서 저녁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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