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자주 기웃대는 우리 동네 맘 카페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주제이다. '맘(Mom)'이라는 끈끈한 연대로 모인 우리 여인네들은 서로의 간지러운 곳을 긁어주기도, 아픈 곳을 도닥여주기도 하며 그 누구보다 폭발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는데, 간간히 등장하는 이 게임 전쟁에 줄줄이 달리는 댓글들을 보면 실소를 금치 못할 때가 종종 있다. 이게 지금 남편 얘기인지 아들 얘기인지 분간이 안될 만큼 흥미진진한 댓글에 나는 어떤 입장도 취할 수 없는 것이, 수많은 아내이자 엄마인 그들의 속을 뒤집어 놓는 그 게임을 우리 남편은 만드는 프로그래머이기 때문이다.
그저 대학시절 친정 오빠가 밤을 지새워가며 '스타크래프트'에 열 올리는 모습을 봤던 것이 아마도 내가 아는 게임 세상의 전부였을 것이다. 그런 내가 소개받은 남편은, 당시 게임 무지렁이였던 나조차도 들어는 봤던 기업의 소속이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던 세상을 만나니 이 남자에 대한 호기심은 자연스레 여러모로 증폭되었던 것 같다. 누군가는 그 '요물'들을 만들어 내고는 있을 것이라 생각은 했으나, 그런 사람을 진짜로 만나보게 되다니... (아니 같이 살게 되다니..)
"사람들이 케이팝만 국위 선양하고 외화 벌이 하는 줄 알지? 그렇지 않아~ 실상은 게임이 케이팝보다 10배 넘게 외화벌이를 하는 효자 콘텐츠야"
남편은 뭔가 아주 억울한 듯이 열변을 토했다. 실제 나 같은 대중은 그저 눈에 보이는 걸로만 판단할 수밖에 없으니 게임이 케이팝의 그늘에 가려져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을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바로 얼마 전에도 기특한 우리 BTS 오빠들이 당당하게 한국어 가사 노래로 빌보트 차트 1위를 기록했다는 소식이 온갖 미디어에서 쏟아졌으니 말이다. 단순히 억울하게 인정을 못 받는 수준이 아닌, 그야말로 집에 있는 수많은 남편들과 아들들을 게임만 하고 앉아있는 '한심한 족속들'로 치부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러한 원인을 제공하는 '사회악'이란 인식이 그득하니 실로 억울하게 생겼다.
하나하나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니 참으로 흥미로운 세상이다. 그래도 여전히 난 게임에는 영 잼병이지만, 적어도 집에 있는 시간 중 60%가량을 게임에 할애하는 남편을 보며 뒷목을 잡지는 않는다. 단순히 게임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알아야 하고 또 만들어가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남편은 게임을 정말 좋아한다.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만들어 보겠다며 화공과 석사까지 받은 후 과감히 길을 옮겨 탔다. 진로를 틀어버린 것으로는 어디 내놔도 지지 않을 나이기에 남편과 나는 여러모로 죽이 잘 맞는 종족이 아닌가 싶다. 한창 아이가 태어나 육아 전쟁을 치르던 시절에도 정말 '틈틈이' 게임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남편을 보며 혀를 내둘렀던 기억이 있는데, 그는 그 시간을 모두 '시장조사'라는 그럴싸한 명목 하에 당당하게 앉아있곤 했다.
'그래... 시장조사 필요하지.. 업계 동향도 당연히 알아야 하고 요즘 게임 트렌드는 어떤지 당연히 다 해봐야지...'(미소 장착어금니 꽉)
얼마 전 어릴 적부터 게임에만 빠져 살던 한 소녀가 지금은 게임음악을 연주하는 스타트업 '플래직'이라는 곳을 운영 중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접했다. 지난해 KBS홀에서 공연을 가진 지휘자 '진솔'의 이야기다. 게임중독으로 부모님 속을 썩여드리던 아이가 오히려 그것이 바탕이 되어 한 장르의 전문가로 성장한 너무나도 멋진 스토리였다.
나도 게임 세상에 관심을 두다 보니, 어느 날 유튜브에서 '파이널 판타지'의 웅장한 오프닝 테마곡을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공연 실황을 보게 되었다. 히사이시 조의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 음악들을 콘서트에서 연주하는 건 익히 봐오며, 국내에 이런 연주회가 별로 열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 아쉬워했었는데, 게임음악이라니? 파이널 판타지는 타이틀만 알고 있는 게임이지만, 이렇게 멋진 음악이 들어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게임음악에 이렇게 공을 들인다고?
어릴 적 피아노를 치면 정통 클래식을 하는 게 당연하고 또 그 길로 가야 하는 줄로만 알았다. 뭔가 그 시절에도 지금처럼 정보가 다양하고 이런 흥미로운 콘텐츠를 더 많이 접할 기회가 있었다면, 나는 여전히 클래식 음악을 고집하고 있었을까? 가뜩이나 호기심천국인 나에게는 가보지 못한 이 길이 너무도 궁금할 따름이다. 이런 멋진 음악을 만들어내는 일을 했더라면 너무 신나지 않았을까...
오래 앉아있을수록 수명이 단축된다는 기사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은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요즘 현대인들 정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서 건강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 건 말 안 해도 다 아는 사실이다. 진종일 앉아 일하는 남편도 늘어나는 뱃살만큼은 피해 가지 못했고 각종 성인병의 고위험군에 포함되는 불운을 맞이하며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생존을 위한) 운동 필수라는 특명을 받아 들었다.
회사 gym에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약 30분간 운동을 한다고는 하는데, 어디 30분이 운동이긴 한 건가. 좀 더 많이 운동하라는 주문도 무색한 것이 사실 늘 피곤한 직장인에게는 그도 참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운동도 게임으로 하라고!
남편이 하도 게임만 해서 게임기를 들어다 내동댕이 쳤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들리던데, 나는 남편에게 링 피트를 선물했다. 그렇게 좋아하는 게임 더 열심히 많이 하라고...
주말이면 그는 어김없이 링을 들고 뜀박질을 한다. 그 모습이 정말 혼자 보기 아까울 지경이다. 링을 누르며 근육운동을 하게 되는 샘인데, 식스팩 복근으로 악당에게 레이저(?)를 쏴대며 공격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가관......아니 장관(?)이다.
도대체 악당을 무찌르는데 왜 링을 들고 뛰어다녀야 하는지가 나에게는 정말 미스터리지만, 악당도 물리치고 건강도 얻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일석이조! 이런 게임 자꾸 만들면......(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우리 집 꼬마도 아빠 옆에서 필라테스 링을 들고 같이 펄쩍펄쩍 뛴다. 가뜩이나 코로나로 활동이 줄어든 아이에게도 좋은 영향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아랫집 생각해가며 살살)
나는 오늘도 남편에게 묻는다.
"그거 시장조사 맞아?"
이제는 대놓고 그냥 노는 중이라고 대답하는 그이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라며 맘속으로 칭찬스티커 하나를 붙여준다.
사실 게임하는 아빠 모습을 많이 보고 자라는 중인 우리 딸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게임에 관심이 늘어가고 있다. 앞으로 아이가 자라며 게임만 한다고 속을 끓이는 여느 엄마들과 다를 바 없이 되어갈는지, 아니면 우리 아이가 맘껏 새로운 세계를 탐방하고 자유롭게 자라나 갈 수 있도록 독려해줄 건지... 빠르게 변화해간 세상을 경험한 우리 세대와는 다르게 그야말로 태어남과 동시에 디지털 세대인 요즘 아이들에게는 적절한 조절력을 키워주는게 부모의 커다란 숙제이지 싶다. 단순히 게임 중독을 논하기엔 이 세대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하나의 놀이문화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프로 게이머든 게임 프로그래머든, 남편에게 하듯 아이에게도 내 욕심을 투영하기보다는 아이가 하는 일들에 칭찬 스티커를 줄 수 있는 엄마가 될 수 있길 바라볼 따름이다. 뭐든 하려면 어설프게 하지 말고 '확실하게' 하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