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칭찬받은 게 문제라고?

너나 잘하세요!

by 마마뮤
마이 프라우드 도터~
(My proud daughter)


자라는 내내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이 말을 참 많이도 남발하셨다.(참고적으로 우리 아버지는 순토종 한국인이시다) 광대가 정말 하늘로 승천할 것처럼 활짝 웃으시며 나를 안아주려 하시곤 했는데, 사춘기를 지나는 다 큰 딸내미에게 있어 아버지의 포옹이 그리 달가울 리가 없다. 나는 질색을 하며 도망 다니곤 했는데, 딱히 어떤 이유랄 것도 없이 우리 아버지는 항상 내게 자랑스러운 딸이라며 그렇게나 애정 표현을 듬뿍 해주셨다.


자라는 내내 칭찬이 난무하는 가정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나는 그야말로 복 받은 사람이다. 천만 다행히도 우리 부모님은 내게 지나친 잔소리랄 것이 전혀 없으셨고, 그에 더불어 누군가의 지시를 듣고 움직이길 참으로 싫어하는 내 성격 덕분에 나는 해야 할 일을 알아서 잘하는 편이었다.


부모님은 내게 야단이나 잔소리보다는 그저 알아서 하리라 믿고 놔두는 스타일이셨다. 결과가 좋지 못했을 때는 다음에 잘하라는 한 마디가 전부였지만, 좋은 결과를 가져오면 엄청난 칭찬을 퍼부어 주셨다. 비단 시험뿐만이 아니라, 사실 뭘 하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생각해보면 부모님의 칭찬이 항상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부모님의 사랑과 지원은 나의 자신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런데!

칭찬을 많이 듣고 산 것이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회사생활의 끝자락을 향해가고 있던 시절, 내 위에는 그야말로 고구마를 백개 먹고 코를 틀어막은 듯 숨이 꽉꽉 막히게 만드는 조용하지만 꼬장꼬장한 여자 상사가 한 분 계셨다. 본인 개인의 역량은 뛰어난지 모르겠으나 인간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어디에 점수를 주어야 할지 전혀 모르겠을 만큼 답답함이 가득한 사람이었다. 그나마 그녀가 상급자라는 사실 하나만이 그녀와의 '관계'에 놓이게 해주는 유일한 끈이었다고나 할까.

(정말 잘라버리고 싶으나 어쩌지 못하는 끈!)


솔직히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렇게 항상 고분고분하기만 한 부하 직원은 아니었던 내가 그녀의 눈에는 골칫거리였을게다. 어느 날 회의실에서 단 둘이 이런저런 진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난데없이 나에 대한 분석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솔직한 직언을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그 상황에서 나의 반응은 어떠해야 맞았을까?

'네, 생각해보니 제가 좀 그렇습니다'라고 수긍하고 웃으며 마무리 짓고 화장실에 가서 욕을 했어야 하나, 아니면 '저에 대해 그렇게 잘 파악해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라며 아부를 했어야 하나.

그녀는 업무지시 또는 조언이라는 명분으로 할 말을 다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입장에선 후배 너님을 위한 나의 진실한 마음이란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사실상 당하는 입장에서 볼 때는 지긋지긋한 언어폭력이었다. 당신이 내 윗사람만 아니라면 당장에 멱살을 잡을지도 모른다는 무언의 협박을 마음속에 늘 간직해야만 했으니 말이다.


어색한 그 상황을 잘 마무리하기 위해 무엇이라도 대화를 이어가야만 하기에 나름의 항변이랍시고 말을 이어갔다.

"제가 자라는 내내 칭찬을 많이 들었어요. 그게 사실 제게는 동기부여를 해주는 매개체가 되었는데, 그래서인지 솔직한 지적에는 여전히 당황스럽고 익숙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 누군들 익숙할 수 있는건가)


그래서 이어진 그녀의 명쾌한(?) 결론은 우리 부모님의 육아 철학까지도 뒤흔들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녀에게 너무 많은 칭찬을 해주는 것이 오히려 해악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당시 고작 여섯 살 먹은 자신의 딸에게도 칭찬보다는 "솔직한" 피드백을 해준다고 했다. (아이가 좀 안됐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에 감동받고 감사했을까?

머릿속에는 '아 눼눼 너 잘났다 너 다 해(처) 먹어라'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예전의 나는 그런 말을 들으면, 그래서 칭찬을 많이 듣고 자란 나는 문제인 건가?라는 생각을 먼저 떠올렸다.

사실 얼마 전까지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아들러 심리학을 다룬 '미움받을 용기'를 읽으며 나의 생각에 많은 수정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철학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타인에게 인정받는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인정받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삶을 택할 것인가


소위 인간의 본능이라는 '인정 욕구'는 부자연스러움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고 다른 사람의 안색을 살피면서 사는 삶,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란 것은 결국 그 누구에게도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고 표현했다. 즉, 내 인생의 중심이 내게 있지 않고 타인에게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칭찬을 많이 듣고 자란 게 왜 문제인 거냐고 말이다. 칭찬을 듣지 못해 주눅 든 삶을 산 사람 역시 그 인생을 문제라고 여기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을 짚어준다.


칭찬도 하지 말고 야단도 치지 말라


인간의 관계를 모두 수평으로 보는 아들러 심리학에서는, 당근을 주느냐 채찍을 주느냐의 문제도 결국은 인간을 상하관계로 놓고 상대가 나보다 열등하다는 전제하에 상대의 과제에 개입하는 것이며, 결국은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는 것이라 정의한다.


현재 아이를 키우는 나의 입장을 대입해볼 때, 아이에게 적절한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주며 아직은 사리분별이 명확하지 않은 아이의 과제에 개입하여 조종하려는 목적이 있음에는 분명 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것이 동등한 입장의 성인 간의 일이라면 사실 전적으로 동의하기 어려워지는 부분이 생긴다.




여하간 어려운 심리학을 받아들이는 나의 그릇은 이 정도 수준에 그치는 것으로 정리하련다.

이유불문 그저 내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대로 자연스레 내 자식을 대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나는 아이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물론 요즘 육아 전문가들의 조언에 따르면, 우리가 흔히 하는 칭찬에는 실수가 많다고 한다. 어떠한 일의 결과에 대해 잘했다는 칭찬을 할게 아니라,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노력한 과정을 칭찬하라고 말하는 것을 봤다.


그러나, 사실 아이를 대할 때 그렇게 많은 생각을 하며 대화하는 자체가 부자연스러움이라고 '엄마 심리 수업'에서 윤우상 박사님은 말씀하신다. 아이와의 대화는 그저 마음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움이 가장 좋다는 것이다. 나는 윤우상 박사님의 의견에 적극 찬성한다. 아이가 예쁘면 예뻐하고, 잘하면 칭찬하고, 잘못하면 야단할 뿐이다. '네가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물을 잘 관찰하고 오래도록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지구력을 발휘했구나~'라는 돼먹잖은 과정을 짜내느라 애쓰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딸아이를 바라보며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남편을 보면, 그 시절 우리 아버지의 부담스럽던 애정 표현이 이제야 납득이 가기 시작한다.

자식은 그런 것이다. 뭘 잘하던 못하던 그저 그 존재 자체만으로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나 역시도 그렇게 딸아이를 바라보며 하늘 높이 광대를 승천시키고 하얀 이를 잔뜩 드러내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함께하는 것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