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피니의 은퇴에 즈음하여 우리는 고민에 빠졌다. 암말 경주마의 경우 괜찮은 여생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씨암말이 되는 것을 꼽는다. 넓은 초지에서 평온하게 지내며 건강 관리를 잘 받고 일 년에 한 번씩 교배를 하여 망아지를 낳는 삶은 치열했던 경주마 생활 끝에 누리는 보상으로서도 분명 꽤 매력적이다.
물론 델피니를 씨암말로 쓰지 않고 승용마로 교육하기로 한 것에는 근본적으로 피니가 우리에게 너무 특별한 말이었기에 그에 걸맞은 삶을 살게 하고 싶다는 생각과 더불어 이토록 애틋해져 버린 말을 지리적으로 먼 곳으로 떠나보내 목숨을 건 출산을 시킬 자신이 없다는 정서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이므로 약간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델피니의 씨암말로의 가치 혹은 잠재력을 따져보지 않았던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신이 없었다. 어느 날 시장에 "델피니 자마"라는 이름표를 붙인 망아지가 나왔을 때 과연 그 꼬마를 구매하고 싶을까. 일단 숫자는 좋지 않다. 출주 회수 열여섯 번이면 아주 적게 뛴 편은 아닌데 우승 한 번 없이 5등급에 머물렀던 기록. 더불어 자꾸만 아팠던 약한 다리를 행여나 물려주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다. 델피니가 망아지를 낳으면 그 망아지는 경주마로 뛰어야 하고, 더 근본적으로는 "팔려야" 하는 데다가 좋은 성적까지 내야 하는데 과연 그게 가능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외조부 혈통 말고는 볼 게 없다" 소리를 대놓고 듣는 경주마가 과연 후세에 유전자를 물려줄 가치가 있을까.
결국 우리는 델피니를 교배시키지 않고 처녀마로 남기기로 했다. 실험적인 혼종은 옹호하지 않는 입장이라 승용마가 되는 순간 순혈 서러브레드 종마와의 교배 가능성이 사실상 없어진 지금으로서는 훗날 찾아올 델피니의 죽음으로 이 말의 고유한 유전자 또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 사실이 이토록 슬프고 씁쓸할 줄 몰랐다는 것이 문제다.
경주용이든 승용이든 델피니의 교육을 시켜본 사람들의 일관된 평가는 이 말이 굉장히 빨리 배운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주마 육성도 빨리 마쳤고 심사도 빨리 합격했다. 승용 교육도 순조롭게 되고 있다. 기승자가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요구하는지 빨리 파악하고 따른다. 머리가 좋으면 필연적으로 꾀를 부릴 확률도 높은데 델피니는 그렇지 않다는 것도 장점이다. 꾀를 부리는 말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교육과 활용에 어려움이 커질 수밖에 없는데 델피니는 정직하고 근면하다. 또한 델피니는 용감하다. 과도한 예민함이나 공포심에서 비롯되는 각종 악벽 하나 없고, 어린 말들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모든 도전적인 순간을 전부 극복해 냈다.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에도 의연함을 유지했던 말이다. 좋은 체형과 암말로서 모두가 선호하는 480킬로그램 대의 체격, 그리고 아름다운 모질과 선한 눈망울은 덤이다. 델피니의 몸속에 흐르고 있는 희대의 명마 "Unbridled's Song"의 훌륭한 유전적 특질도 빼놓을 수 없다.
어떤 말이 유전자를 남길 가치가 있는지 여부에 관한 우리의 판단은 종종 성급하거나 오만하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 종들 가운데 초월적으로 뛰어난 지성을 가졌다는 자부심에서 비롯된 날카로움과 냉정함, 그리고 산업적 필요에 의한 극도의 신속함까지 겸비한 인간은 스무 살 넘게 사는 동물의 가치를 생 후 두세 살 때 결정짓기에 이르렀다. "딱 보면 안다"는 그 흔한 말은 사실 경솔함과 오만함의 표상이다. 어떤 말이 어떤 상황 하에서 잠재력을 꽃피울지 결코 쉽게 단언할 수 없다. 우리는 더 빨리 더 많이 팔기 위해 그 협소한 잣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수많은 말들을 도태시킨다. 환경과 여건을 바꿔 기회를 한 번 더 주기보다는 말을 바꾼다. 그 편이 쉽고, 싸다.
델피니가 낳을 새끼를 믿어주지 못한 스스로를 반성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만은 믿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다. 델피니 자마가 홀대를 받고, 또 그로 인해 모마 델피니의 가치가 한 번 더 깎여 나가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다. 델피니가 자신을 닮은 망아지를 낳을 가치가 충분한 좋은 말이었다는 사실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그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