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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각쟁이 Jun 08. 2022

오지 않은 내일을 사랑하는 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왜 글을 쓰시나요?"



해 질 녘이었다. 강원도 홍천에서 산으로 둘러싸인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자동차 전면 유리창이 오로라 빛으로 넘실거렸다. 해가 지는 하늘은 마치 갑작스러운 프러포즈를 받은 여성처럼 물들었다. 해사했던 하늘은 수줍게 물든 자두 빛 립스틱을 그어 놓은 듯 울그락 불그락 피어올랐다.      


노면의 진동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운전대를 잡고 액셀을 밟을 때마다 산이 쫓아왔다. 큰 산 너머의 작은 산, 그 산 너머의 희미한 산까지 전부 우르르 달려왔다. 장시간 에어컨을 켜고 달려서인지 머리가 마취된 듯이 멍했다. 창문을 내리자 비 내리는 날 맡았던 흙바닥 냄새가 났다. 찰나의 차이로 꽃향기가 폐부로 밀고 들어왔다. 순백의 포도송이를 매달은 아카시아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거대한 군락이 있었다. 산 전체가 마치 한 그루의 아카시아 나무인 듯 밀집해 있었다.     


차 안으로 몰려드는 바람에서 성난 압력밥솥 소리가 났다. 올드팝이 흘러나오던 라디오의 볼륨을 높이자 나무들이 리듬을 타며 춤추기 시작했다. 땅 속 깊은 곳에 뿌리를 박고 휘적휘적 흔들리는 거대한 생명력에 절로 시선을 빼앗겼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우직하게 서 있던 나무들과 장거리 운전자의 뻐근한 어깨를 모두 들썩이게 만들었다. 산속 구 도로를 운전하는 일은 숨은 그림 찾기를 할 때의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로 만들곤 한다.     



‘파파파 박’ 영사기 속에 필름이 돌아가 듯. 수백수천 개의 전구가 천장을 달음박질치고 나서야 터널 밖으로 빠져나왔다. 잠시 시간을 달려온 사람처럼 어리둥절했다. 하늘이 새까맣게 시치미를 뚝 떼고 밤이 되었다. 낮 동안 감탄과 경외의 대상이었던 산의 모습이 어느새 달라졌다.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비죽비죽 선 가지는 야생 동물의 갈퀴를 떠올리게 했다. 나무들은 유령이 검은색 암막 커튼을 뒤집어쓰고 두 팔을 들어 위협하듯 흐느적댔다. 속을 알 수 없이 온통 까맣게 변한 산속에는 무엇이 숨어 있는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기다란 팔에 잔털이 일어서자 서둘러 창문 버튼을 눌러 닫았다. 액셀에 힘을 주곤 빠른 속도로 빠져나왔다.     


바삭하게 튀겨진 어포처럼 낙엽이 깔린 길에서 만난 다람쥐와 도랑들, 다정하게 울던 새들에게 귀 기울이며 오르는 산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에는 사마귀나 개구리를 잡겠다며 동네 친구들과 막대기 하나에 의지해 슬리퍼로 정상에 오르곤 했다. 산은 아이들에게 놀이터이자 삶의 무대가 되곤 했다. 어른이 되어 회사에 다니며 사람 관계나 일이 마음처럼 잘 안 되는 날이 있었다. 그런 날이면 신발장에 새로 사 둔 등산화의 끈 묶는 상상을 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나 사람들의 열 길 마음속은 몰라도 산에는 정해진 등산로를 따르면 누구나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정직하게 땀을 흘린 만큼 깔끔하게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산 위에서는 등에 진 배낭의 무게만큼 속도가 느려진다면 인생에서는 그 반대였다. 한 해 한해 나이를 먹고 책임질 가족이 늘어갈수록 삶에 가속도가 붙었다. 내리막길처럼 속도가 빠를수록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많아졌다. 사소한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기쁨들을 수두룩하게 놓쳤다. 구체적인 삶의 질감과 색감이 빠르게 퇴색되는 기분이 들었다. 기쁨과 놀라움으로 가득했던 나만의 산에 자주 캄캄한 밤이 내려앉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삶이라는 녀석이 달려들 때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마치 조그만 조각칼을 들고 둔탁하고 둔감한 굳은 삶의 흔적을 잘라내는 심정으로 썼다.     


인류와 함께 탄생한 미신에 대해 생각해 본다. 과학이 덜 발달한 그 시절 천재지변이나 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 같다. 귀신이나 살인자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공포영화가 더 무서운 법이다. 사람들은 어디서든 인과관계를 찾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제사나 주술적인 것들에 의미를 두기 시작했을 것이다.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에는 빨강, 검정, 노랑 등으로 그린 말, 사슴, 들소들의 그림이 그려진 라스코 동굴벽화가 있다. 벽화에는 사냥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내일의 사냥을 위해 캄캄한 동굴 벽에서 횃불에 의지한 채 그림을 그리는 구석기 사람을 떠올려본다.      


그는 낮 동안 관찰했던 사슴의 따뜻한 색감과 질감을 묘사하고 싶다. 그림에 색감을 더하는 순간, 손끝에서 희미한 전율이 오른다. 빗물을 담거나 불을 피워 식량을 익히기 위해 흙으로 빚은 토기에 빗살 무늬를 새기던 사람은 또 어떤 마음이었을까. 미켈란 젤로가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리던 순간에도 미학은 종교를 통과해서 나온다. 사람들의 삶을 향한 아름다운 사랑, 그것은 어쩌면 인생 곳곳에 미학으로 표현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미학은 때론 시가 되고 음악이 되기도 하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된다. 사람들 속에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뿐이다.     



기름을 붓고 튀기듯이 쌀을 볶아낸 볶음밥을 오묵한 접시에 담고서 늘 깨를 뿌린다. 깨를 뿌려도, 뿌리지 않아도 똑같이 맛있는 볶음밥이지만 ‘깨 뿌리기 행위’는 정성스럽게 요리를 마무리 짓고자 하는 나만의 의식이다. 떡국을 끓일 때도 계란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해 어슷 썰어 고명을 얹는다. 세탁기에서 쭈글쭈글 나온 하얀 셔츠를 반듯하게 다려 입고 신발 리본을 돌아가지 않고 단정하게 매는 일도 어찌 보면 글을 쓰는 이유와 다르지 않는다. 빠르게 흘러가는 삶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고자 시작했던 일은 글을 씀으로써 삶을 단정히 가다듬는다. 글을 쓰다 보면 매일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기분이 든다.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김훈 작가님의 말씀을 빌려 마무리하려고 한다.        

   

“나는 글을 쓰는 내 손이 

세심하게 바늘을 쥔 옷 수선공, 

신명 난 가위로 엿을 내리치는 엿장수, 

호기심 많은 아이들의 손을 닮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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