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할머니 집에는 낡은 물건들이 살았다. 꼬부랑 할머니의 세월만큼이나 낡아 무디고 빛바랜 소품들. 무더운 여름날 풍경을 바라보면 어쩐지 그곳에서 기억이 되살아난다. 거기에는 촐랑촐랑거리던 어린아이가 여름과 손잡고 함께 살았다.
#1. [일력]
손때 묻은 벽지 위에 하얀 일력이 걸려있었다. 양 날개가 슬며시 들린 일력은 바람을 타고 펄럭였다. 일주일 내내 장대비가 내리는 날이면 풀이 죽어 축 쳐져있곤 했다. 나가 놀지 못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해가 중천에 뜨고 땅 위 그림자마저 열기에 살금살금 사라지면 갓 구운 김처럼 바삭하게 살아나곤 했다. 한 장, 한 장 들뜬 마음 사이에 바람이 풀썩거렸다. 언젠가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달아나기를 꿈꾸기라도 한 듯. 여기서 잔인한 현실은 볼일이 급한 가족들이 일력을 한 장씩 뜯어 구기며 화장실로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일력의 못 이룬 꿈은 창문 밖에 눈송이가 떨어지고서야 깨어났다. 더 이상 펄럭일 수 없이 초라하게 몇 장 남지 않고서야 새해가 왔다. 희고 고운 일력으로 다시 채운 가족들이 둘러앉아 희망과 기대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일력은 매번 다시 태어날 수 있어 좋겠다, 치~’ 그때의 일력은 새로 산 가전제품처럼 위풍당당했다. 다가올 우리들의 삶도 그럴 수 있기를 바라본다.
#2. [선풍기]
할머니 집에는오래된 선풍기가 있었다. 회전 버튼을 누르자 고개를 돌릴 때마다 ‘투둑’ 소리가 났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풍기 고개는 자꾸 주저앉았다. 꼭 모래사장에서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사람 같았다. 손으로 올리고 ‘끼익’ 다시 내려가 올리다가 ‘끽’ 마침내 땅을 바라보는 처지가 되곤 했다. 마음속 자신감이 모두 꺼진 날의 누군가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굽은 할머니의 등이 떠오르기도 했다. 갑자기 불려 나간 학교에서, 홀로 꾸려온 빠듯한 세간살이를 정리하며, 잠든 네 아이들의 머리맡을 지키며 할머니는 자주 고개 숙인 여인이 되곤 하셨다.
‘자존심을 누르고 돌아온 날에도 자식들을 먹일 끼니 걱정을 하셨겠지...’
불행 중 다행인지 낡은 선풍기는 끈질기게 강인했다. 매해 여름방학 할머니 댁에 돌아오면 선풍기부터 확인했다. “강풍” 바람을 내어주는 신형 선풍기를 기대했건만 결과는 언제나 “아기바람”을 솔솔 내어주는 낡은 선풍기였다.
진정으로 강인한 건 오래 남는 법이다. 값싼 유행처럼 돌지 않고 우직하게 지켜내는 것이다. 자존심으로 칼날을 세우기보다 한 걸음 물러나 지금 가진 소중한 것들을 지켜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이제 곧 아흔이다. 주말마다 자식들은 각자 할머니가 좋아했던 음식들을 싸들고 옛집에 모여든다. 할머니의 세간살이를 보며 자식들이 거꾸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할머니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숙이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