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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각쟁이 Jun 22. 2022

그 여름 우리가 누운 자리

이글이글함이 식고 난 여름밤의 흔적

 

뙤약볕을 피하려고 뛰어든 담벼락의 그늘,

머그잔에 담긴 미지근한 생수의 비릿한 맛,

발등 위에 새겨진 하얀 샌들 자국,      


“여름”하면 단짝처럼 “방학”이 따라오곤 한다. 어른이 된 후에도 초등학교로 돌아가는 꿈을 꾸기도 한다.      


80년대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굴삭기가 땅을 파내는 모습을 쉬이 볼 수 있었다. 공사 소음 사이로 까치의 울음이 비집고 들어왔다. “띠~띠~띠~” 중장비가 내지르는 경고음이 도심 속 하늘 위의 새들보다 더 높이 날아갔다. 멈춰서 있던 차들이 신호를 받아 노면을 구르면 코끝에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도심 속에 여름이 찾아왔다. 태양이 머리 위로 솟는 오후가 되면 불볕더위를 피해 길 위는 텅 빈 도시가 된다. 이글이글한 길은 아지랑이와 개미의 놀이터가 된다. 모자를 눌러쓴 아저씨들이 페인트로 놀이터를 칠하고 계셨다. 뱃속에 기생충도 잡아줄 것 같은 강력한 화학 냄새였다. 긴긴 장마가 오기 전에 칠해야 바짝 마르기 좋은 계절이니까. 축축한 우울함도 긴긴 태양 아래 지쳐 바짝 마르곤 하던 여름은 그야말로 더위와의 전쟁터였다. 계절이 주는 치열함 앞에서 상념과 고민거리도 줄행랑을 치곤 했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자 비무장지대에 있는 시골 할아버지 댁에 맡겨졌다. 방학이 오고 밥벌이에 바쁜 부모님의 돌봄을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런 자극 없는 심심한 시골 살이를 울며 겨자 먹기로 떠나며 가방 한가득 “챔프” 만화책을 채웠다. 돌덩이 같은 배낭을 짊어진 발걸음이 무거웠다.     


시골 한옥집이 갑갑할 때 즈음 나와서 무작정 걸었다. 가끔 도랑을 만나기도 했다. 경쾌하게 튀어 오른 물방울이 둔탁한 바위를 울리는 소리가 2중주처럼 들렸다.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버드나무는 바람의 변주에 맞춰 능수능란하게 허리를 꺾었다. 강가에서 만난 수북한 갈대 속에선 작은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집 나간 어미새를 찾는 것인지 ‘파르르’ 떨림이 느껴졌다. 귀뚜라미는 납작 엎드려 다듬이질 소리를 낸다는 것도 여름방학 덕분에 알게 되었다.      


길에서 미정이와 지만이를 만나 합류했다. 여름방학에 만나는 친구들이었다. 아담한 나무에 요구르트 빛 살구가 “다닥다닥” 달려있었다. 작은 발로 나무를 차면 열매가 우박처럼 떨어졌다. 냇가로 들고 가 차가운 물에 씻어 먹곤 했다. 우지끈 깨물면 살아 꿈틀 거리는 애벌레를 만나기도 했다. 살구를 바닥에 집어던지고 밟고 소리를 지르면 지켜보던 시골친구들이 와르르 웃었다.      



그 당시 시골은 밤 열두 시까지 아이들이 길에 나와 놀아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외출할 때에도 대문을 잠그지 않았다. 외지 사람이 들어오지 않아 서로 뻔히 아는 이웃들이 전부였던 곳이었다. 도둑보다 무서운 건 지뢰의 위험을 알리던 빨간 깃발뿐이었다.


하루는 아이들과 까만 밤이 되도록 쏘다녔다. 논 한복판에 옹기종기 모여 도시에서 가져온 폭죽을 꺼내었다. 그 기다란 폭죽을 품에 안고 걸어오는 내내 자부심이 비죽 솟아올랐다. 물이 찰랑하던 농수로에는 맹꽁이들이 우악스럽게 합창을 하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불붙은 폭죽이 하늘을 둘로 길게 가르던 순간 머리카락 사이로 청량한 바람이 불어왔다. 잠시 후 캄캄한 논밭에 서치라이트가 비치고 무장한 군인들이 나타났다. 쪼그라든 풍선처럼 주눅이든 아이들은 부모님들에게 인계되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곳은 비무장지대라 불꽃놀이가 금지되어있었다.      


군인들이 떠났다. 어떤 벌이 내려질까 불안했던 마음은 또다시 떨림으로 바뀌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귀여운 작당모의가 실패로 돌아가자 아쉬움을 달래주기 위해 주섬주섬 물건을 챙겨 오셨다. 다 쓴 분유통이나 페인트 통에 딸강딸강 철사를 묶어 쥐불놀이를 했다. 뚫어 놓은 구멍 사이에서 노랗고 빨간 불씨가 이글이글거렸다. 뜨거운 열기를 이겨내며 철사 끝을 잡고 뺑뺑 돌리자 금반지처럼 노란 동그라미가 허공에 그려졌다. 노래방에서 보았던 미러볼이 돌 듯 머리가 어지럽고 묘한 흥분감이 차올랐다.      



숨이 차올라 하늘을 바라보니 저 먼 하늘에서 별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논밭에 펼쳐진 지평선은 좌우로 달음박질치고 새까만 산은 숨죽인 동물처럼 고요히 엎드렸다. 광활한 대자연 앞에 서있던 작은 몸은 절로 숙연하고 겸손해졌다. 도시의 허세와 자만심이 쏙 빠지고 담백해져 가는 동안 점점 그곳 아이들과 같은 피부를 지니게 되었다. 그제야 서울에 두고 온 가족들이 떠올랐다.  


갑자기 논밭에 바람이 불어오자 풀들이 드러눕는 소리가 났다. ‘타닥 타다닥’ 장작이 타는 소리 같았다. 천천히 드러누운 풀들은 바람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캄캄한 밤이면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 아버지가 베개를 정리하고 돌아 누우며 한숨을 쉬던 등이 떠올랐다. ‘하루 종일 켜놓아서 아랫목처럼 뜨끈해진 티브이를 끄고 돌아눕던 할머니의 비적 마른 등도 그랬지...’ 어두운 밤을 숨죽여 지나고 나면 어김없이 맑은 날이 찾아오곤 했다. 나이테 위에 겹겹이 세월과 계절이 새겨지듯 우리들도 그 속에서 날로 단단해져 갔다.       


메밀꽃처럼 하얗게 핀 들꽃들이 달빛을 받아 표표히 빛났다. 땅 위에 밤하늘이 쏟아졌다. 조그만 꽃들은 흩뿌려진 별들처럼 흔들리며 빛나고 있었다. 무수한 밤을 거닐면서도 스스로 빛나는 사람들이 있다. 삶에 대한 불씨를 손에 꽉 쥔 채 앞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에게선 짙은 불냄새가 난다. 뜨거웠던 불씨가 남긴 향기는 오래도록 삶의 여운이 되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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