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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각쟁이 Mar 29. 2024

괜찮은 척하는 마음

꽃이 피는데 왜 마음이 엉망진창일까

'비에 젖은 이불을 덮고 사는 기분이 들었다.'


'꼭 물을 잔뜩 머금은 솜이불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데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어려워 핸드폰을 열었다. 이내 화면 위로 쇼츠가 쏟아져 내렸고 그 은총의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하루를 소비했다.' 


'날씨가 화창하면 할수록 속은 더 꿀꿀해졌다.'


 벚꽃과 개나리가 만개한 창밖으로 아이들의 해사한 웃음소리가 비집어 들어오고 집 안은 우울의 비가 내렸다. 이렇게 비가 끊이지 않다가 익사하진 않을까 걱정되었다. 우울감의 원인을 골똘히 생각해 보니 봄이구나 싶었다. 세상은 꽃과 향기로 만발하는 봄이 왔는데 나의 마음은 여전히 추운 겨울 속을 언 발로 방황하고 있었다. 계절과 계절의 틈바구니에 끼어 요지부동 못하는 이 무력한 마음은 무얼까 생각하며 밖으로 나갔다. 길에서 우연히 알고 지내던 지인과 얼굴을 마주쳤다. 얼른 입꼬리 근육을 들어 올려 우울의 얼굴을 지웠다. 숨을 크게 들이신 뒤 가슴을 쭉 펴고 꽤나 당당하게 다가가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괜찮은 척하는 나 정말 괜찮은 걸까.       


하루에도 여러 번 상처받고 부스러지기 쉬운 영혼을 붙들며 살아간다. 현관문을 열고 나와 놓쳐버린 엘리베이터 앞에서 느낀 후회는 매정하게 문을 닫고 출발해 버린 버스 정류장 앞에 선 나를 작은 부스러기로 만든다. 마음은 안과 바깥으로 충격을 받는다. 오래된 쿠키처럼 잘린 파편들 사이로 회한과 아쉬움이 부스러기를 남긴다. 정말이지 일상은 좌절의 연속이다. 자본주의 경쟁 사회에서 실체가 없는 불안감은 나날이 커져만 간다. 하루종일 침착함을 유지하며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 배워간다. 성격 좋아 보이는 척 연기하던 마음속의 예민함은 그 사이에서 갈려 더 작은 부스럼을 만든다.      


평범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달까. 평범함을 입어야 이 사회에서 거절받지 않고 수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진정한 평범이란 어떤 모습일까. 드라마와 영화 속 주인공들은 위기의 상황에서도 곧잘 일어선다. 절체절명 위기의 상황 속에서도 안정된 삶보단 무모한 도전을 선택한다. 그건 드라마니까 그럴 수 있다 치자. 일반 사람들은 어떨까 싶어 들여다본 sns 속 사람들 역시 범상치 않다. 나이를 이겨낸 외모와 물리적인 환경을 이겨낸 사람들의 성공 법칙들이 공식처럼 쏟아진다. 고개를 돌려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니 다들 한결같이 웃으며 행복한 모습이다. 행복만 가득한 이상한 지구 위에 혼자 남겨진 슬픔씨는 이번 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다른 사람들은 대체 우울이나 슬픔들을 어떻게 처리하나. 화장실에 몰래 숨어 변기 속에 넣고 버튼을 꾹 내려버린 슬픔을 살균용 거품비누로 닦아내진 않을 테다. 밝고 상냥한 그들의 이면에도 혹시 정상성에 대한 기대가 있진 않았을까. 모두가 행복한 사람뿐인 이 세상에서 어떻게 우는 마음을 내보이는 건 어렵다. 더욱이 나약함을 함부로 보이는 일은 위험하다. 고민 끝에 우는 얼굴은 화장실에 달린 손바닥만 한 거울을 통해서만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거울 속에서 자신의 얼굴이 조금씩 나이를 먹어간다. 사람이란 평생 자신의 얼굴을 거울을 통해서만 바라볼 수 있는 조금 슬픈 존재이다. 어쩌다 뒤통수나 엉덩이를 한 번 볼라치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워져야 하던지 웃음이 난다. 더욱이 슬픈 건 자신의 우는 얼굴을 쉽게 떠올릴 수 없다. 처절한 코흘리개 같은 울음의 순간 어떤 주름을 어떤 모양으로 구부리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전염병 취급을 받아온 슬픔과 우울을 숨기느라 바빴던 날들이 영화처럼 지나간다. 결과적으로 나는 괜찮은 척이 필요한 ‘안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동안 남들 앞에서 보인 배려와 상냥함 또한 자기 방어적인 태도는 아니었을까. 이쯤 되니 모든 게 의문투성이다.      


마음이 아픈 날 나는 어딘가 더 못나 보인다. 작고 사소해 보이는 장점들에 비해 단점이 확대되기 때문이다. 가끔 커다란 눈망울을 하고도 기다란 인중 때문에 마스크 속에 숨어 마기꾼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마음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속의 치부를 숨기는 은근한 태도나 부러움을 사고 싶은 마음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등이 장점을 가려서 못나게 만든다. 마음의 결핍감을 느끼던 순간 자신에 대한 관찰과 판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현대인들은 나아가기에만 바쁜 사람이다. 하루라도 부지런히 자기계발하지 않으면 영영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아 불안감으로 살을 찌운다. 이렇게 과장된 마음으로 감정이 소모되는 날에는 밖으로 걸어 나가보자. 인간의 사고는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 나라는 사람을 안에 두고 밖에서 객관적으로 들여다보자. 사람들은 하루에도 수많은 감정을 처리한다. 일시적인 순간의 감정이 전부 ''는 아니다. 순간의 감정을 그저 소모해고 남은 감정의 껍데기로 바라보고 가게 두는 일은 알아차림으로 시작된다. 감정을 분리해 보면 줄타기 같던 삶의 균형감을 잡을 수 있다.

     

울음은 아기들의 주특기이다. 하루에도 여러 번 거뜬히 운다. 아기의 울음은 덜 비밀스럽고 직관적이다. 놀아 달라거나 기저귀가 젖어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울기도 하지만 잠투정처럼 울음 그 자체가 목적인 경우도 있다. 한 바탕 울고 나는 행위가 필요한 때도 있다. 자신의 울음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핍이 보인다. 울음뿐만이 아니라 웃음 또한 거울처럼 자신을 비추어 준다. 나란 사람은 어떨 때 즐거워하고 흥미를 느끼는 사람인가 해석이 필요하다. 만약 지금 하고 싶은 일이 없고 무얼 해도 즐겁지 않다면 당신의 마음이 위독하다는 시그널이다. 삶에서 즐거움이 부족해지면 에너지가 떨어진다. 쉽게 피로하며 흥미와 열정도 사그라든다. 그동안 소원하던 자식이 성인이 되어서 갑자기 함께 놀자고 찾아오면 뭘 해야 할지 걱정부터 될 것이다. 나랑 노는 것도 놀아본 사람이 놀 줄 안다. 놀아본 적 없는 사람은 즐거움의 경험을 단시간에 느끼기 어렵다. 몸이 뻐근하듯 감정에도 경직이 온다. 긴장을 푸는 휴식과 달리 놀이에는 움직임이 구된다. 동네를 산책하고 오는 길에 꽃을 사 오거나 영화를 보고 나를 위해 차려진 음식을 오감으로 즐기는 행위에는 애쓴 움직임이 다. 기분전환 행위들을 재충전이라 부른다. 방전된 배터리에 기운을 채우는 일은 신기하기도 체력을 비축하는 일이 아니라 태울 때 가능하다. 태양광 배터리를 하나씩 등짐처럼 메고 각자 부지런히 오가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우리는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인생은 영원하다는 착각을 한다. 시작이 존재하듯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 즐거운 환희와 연옥과도 같은 가시밭길에도 끝이 있다. 인생은 영속적으로 계속되지 않는다. ‘기쁨’이나 ‘행복’ 혹은 ‘의지’나 ‘열정’ 등 무형의 순간에도 말이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사랑의 열정도 매일 아침 미라클 모닝을 지속해오던 의지의 순간에도 끝이 있다. 긴장의 연속을 질병이라 부른다. 끝없는 열정과 의지에도 쉬어가는 날들이 필요하다. 어떤 이들은 ‘노인’을 ‘살아남은 자들’이라고 부른다. 으깨어지고 부서지기 힘든 이곳에서 우리는 부지런히 살아남는 중이다. 유난히 자책하는 마음이 드는 날이면 나와 함께 놀 궁리를 하자. 알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니 자신과도 마찬가지이다. 마음이 울음을 우는 날 나와 시간을 채우러 떠나보자. 봄이 오면 일출시간에 따른 생체리듬의 변화로 몸에 피로와 무기력을 마음에는 감정 기복을 증가시킨다고 한다. 봄볕 아래 옹송그린 새싹처럼 부지런히 해를 받으며 신체활동을 늘려나가도 좋다. 좋아하는 일로 채우는 봄처럼 부지런한 시간 속에서 활력과 호가심이 꽃을 피우는 법이다. 겨울 속을 헤매던 언 발은 이제 봄을 향해 내딛을 차례이다. 봄은 몸과 마음을 움트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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