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어릴 때도 그랬어? 은유가 아침마다 드레스 입겠다고 징징대는데~기억을 상실한 도깨비라도 삶아먹었나 봐~어제도 드레스 입었다고 말해줘도 귀에 떡꼬치를 꽂았는지 절대 안 들어! 누굴 닮아 이리도 고집쟁이인지 모르겠네~"
여름방학을 맞아 시골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 놀러 왔어요. 멀리 살아서 자주 볼 수 없는 할머니와의 첫 만남이 글쎄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어요. 바로 엄마 때문이죠.누구나 엄마 앞에서는 어리광도 부리고 힘든 내색도 하고 싶은 건 어린 나도 잘 알아요. 한데 그 많은 것 중에 내 욕이라니...부엌에서 채반을 정리하던 엄마의 빈정대는 목소리가 하도 커서 내 귀에까지 흘러들어왔어요.
'치이~ 자기 엄마 만났다고 나는 안중에도 없는 건가...'
은유는 할머니의 방을 둘러보았다. 손때 묻어 색이 더욱 짙어진 오래된 경대가 있었다. 자개로 화려하게 장식된 경대에는 작은 서랍들이 달려있었다.
'오호라~호기심 괴물은 오늘도 나를 가만두지 않는구나.'
두 손은 어느새 서랍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첫 번째 서랍을 열자 유가 캔디와 콩알이 송송 박힌 사탕 그리고 화려한 빛깔의 수박모양 젤리들이 들어있었다.
반지처럼 동그란 손잡이에 검지를 걸어 두 번째 서랍을 스윽 빼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갈치 가시를 닮은 촘촘한 참빛이었다. 왠지 이걸로 머리를 빗으면 두피가 따~끔할 것 같다. 머릿니들도 날카로운 빛살에 지레 겁먹어 도망가나 보다...서랍 구석에는 정열의 붉은빛 캔음료에 "홍삼드링크"라고 무척이나 진지하게 적혀있다. 가을 하늘 빛의 88 담배는 속이 텅 빈 채로 찌그러져 있었다.
잠시 후 콧속으로 비릿한 쇠 냄새가 스쳤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주위에는 온통 쓰고 남은 동전들이 바닥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손바닥에 올려 꼬옥~ 쥐어보았다.
[ illustrated by Kimi ]
"엄마~저 할머니 집 앞에 좀 구경하고 올게요~"
엄마 때문에 속상한 적 없다는 듯이 무표정한 얼굴로 집을 빠져나왔다. 엄마가 알면 온종일 귀찮게 옆에만 붙잡아 둘 것 같다. 작년 여름 할머니 집에 놓고 간 빨간 고무장화는 햇빛을 받아 색이 바랬다. 헐거웠던 장화는 이제 발에 꼭 맞아 뜀박질하기에 적당했다. 햇볕이 내려쬐는 시골길을 먼지 나게 달려서 나만의 비밀 장소를 찾아간다.
두 개의 물줄기가 휘몰아치다 만나서 커다란 강물을 이루는 곳. 그곳엔 한 아름에 안을 수 없이 뚱뚱하고 커다란 느티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는 어미 잃은 새끼들을 품듯 마을 전체를 돌보고 있었다. 나무에 등을 기대어 앉으니 머리에서 흘러내리던 땀방울은 불어오던 강바람을 따라나섰다. 무르팍 위에서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는데 배가 꾸르륵~ 배가 고파왔다.
나무에 한 손바닥을 얹고 빙~ 둘러보았다. 나무 반대편 손수레에서 핫도그를 튀겨 파시는 할아버지를 발견했다. 노파는 굳게 다문 입술만큼 고집스러운 정성으로 핫도그를 만들고 계셨다.
노파는 액체 괴물처럼 쫀쫀한 반죽에 소시지 꼬치를 돌돌 말아 균일한 두께감의 옷을 입혔다. 첫 번째 옷은 파운드케이크처럼 촉촉하게 두 번째 옷은 튀김가루를 덧 입혀서 바삭하게 튀겨낸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아이들은 기름 냄새를 맡자 귀신같이 몰려들어 한 바탕 핫도그를 사 갔다. 노파의 손수레 앞에는 다시 나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졌다. 동전의 무게로 축 처진 고무줄 바지의 주머니 안에서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노파는 의심의 눈초리로 한 번 슬쩍 바라보곤 다시 침묵을 지켰다. 지레 겁먹은 나는...주머니에서 오백 원짜리 동전 두 개를 애써 자신만만하게 내놓았다.
"하....핫도그 하나 주세요"
갑자기 컴컴한 마음속 방안에 있던 할머니의 경대 위로 서치라이트가 켜졌다. 나는 순간 얼굴로 두려움이 나타날까 초조해 졌다.
" 이런~ 꼬마야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는가 보구나... 이 할아버지가 비밀 이야기 하나 해줄까? 사실 이 할애비 핫도그에는 가끔 정령님이 찾아온단다. 절실한 소원을 품은 아이가 핫도그에 소원을 빌고 먹으면 들어주시기도 한단다. 단 조건이 있다. 남은 꼬챙이를 집에 가져가서 흙바닥에 정성껏 심어야 한단다. 매일 아침 일어나 물을 주며 소원을 빌다보면 새싹이 돋아나지. 그 순간! 소원이 이루어질 게다...이건 대대로 핫도그를 만들어온 우리 집안의 비밀이란다... 사실 저기 저 느티나무도 처음엔 누군가의 소원을 품은 꼬챙이였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자~ 옛다 받아라. "
포개어진 두 손으로 기우뚱 받아 든 핫도그에 붉은 케첩으로 소원을 적었다.
'꼬챙이 정녕님 부디 제 소원도 이루어 주세요.'
<낮잠 늘어지게 자고 일어 난 오후>
잠이 덜 깨서 눈이 퉁퉁부은 꼴이 되었다. 나는 몰래 마당으로 뛰어나왔다. 시멘트를 바른 네모난 수돗가 옆으로 살구색 봉숭아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그 사이에 핫도그 꼬챙이가 수줍게 심어져 있었다. 혹시 들키게 되면 곤란할것 같아 몰래 고무호스를 집어들었다. 꼬챙이에 물을 주던 찰나...열려진 작은 창문 너머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엄마와 아빠가 나지막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여보 아까 아버지가 장에 다녀오시는데.. 엄마 생일 선물이라고 뭘 사 오셨는지 알아? 반짝이는 파츠가 달린 분홍 진달래가 앞가슴과 옆구리에서 막 개화를 시작한 빨간 블라우스!!! 엄마랑 나랑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니까. '당신 빨강 좋아하잖아....'하고 멋쩍으신 듯 방으로 쓱 사라지시더라."
"여보가 그 블라우스를 입어 본 엄마를 봤어야 하는데.. 온 동네 사람들이 엄마 집으로 꽃놀이를 올 지경이었다니까. 우리 아부지는 철 지난 386 컴퓨터도 아니고 왜 엄마 카테고리는 늘 업데이트를 안 하시는 걸까. 엄마가 빨강 좋아하시던 건 다 지난 옛날이야기인데 말이야. 요즘은 할매들도 패션에 신경 써서 무채색으로 입는 걸 좋아하신다구... "
나는 무심결에 엄마 화장대 위의 립스틱이 떠올랐다.아빠가 엄마에게 선물한 유행 지난 색감의 립스틱이었다. 칼로 깎아놓은 듯한 단면의 립스틱은 제 갈 길을 잃은 듯 보였다.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핸드폰을 들고 화장실로 숨어버린 아빠가 쪼그리고 앉아 어느 날 구매했던 그 립스틱 말이다. 나는 가끔 엄마가 설거지 하느라 정신없을 때면 몰래 발라보곤 뚜껑을 닫아두곤 했다.
'가족끼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무슨 가족이 이래...에이~'
우리 가족은 서로의 취향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는 것 같다. 엄마는 내 또래 친구들이 무슨 만화를 좋아하는지 모른다. 정확히 말하자면 관심이 없다. 친구들이 유행하는 TV 만화로 역할놀이를 할 때면 나는 그 옆에서 침묵을 지킨다. 강아지나 환자 또는 아기처럼 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엄마는 이런 내 마음을 알기는 하는 걸까.
아빠의 사정도 마찬가지이다. 지옥철을 뚫고 퇴근한 아빠는 가끔 영혼을 회사에 두고 올 때가 있다. 유치원에서 오늘 있었던 일을 열심히 떠들고 있는데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아빠의 멀뚱한 표정을 볼 때면 마음 한 구석이 얼어붙는다. 그 후로 입술도 쩍 달라 붙어버렸다.
아빠가 무대위의 삐에로처럼 웃음을 잃지 않은 채 텅 빈 눈빛을 띄는 날이면...
나도 모르게 아빠를 향한 반감이 들곤 했다.
[ illustrated by Kimi ]
< 그날 밤 은유의 꿈속 >
" 쿵~ 쾅쾅쾅~~ 계십니까~~? "
누군가 문을 두드리며 초인종을 다급히 울린다. 아까 할머니의 방에서 동전을 훔친 게 걸렸나보다. 경찰들이 나를 잡으러 온건 아닐까 더럭 겁이 난다. 잽싸게 침대 밑으로 숨어버릴까 생각하다가 빼꼼히 문을 열었다.
"아고~공주님 여기 살고 계셨군요.. 이렇게 누추한 곳에서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습니까. 위대하신 왕과 왕비님께서 공주님을 간절히 기다리고 계십니다. 얼른 성으로 떠날 채비를 하시지요. "
' 뭐... 내가 사실은 공주님이었다고...? '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은 서커스단에서 막 튀어나온 듯 앞코가 들린 신발과 광대 옷을 입은 피에로 아저씨였다. 나를 데리러 왔다고 한다. 어느 날 병원의 착오로 인해 아이가 뒤바뀌어 버렸지만...추적 결과 내가 공주가 확실하다는 비밀문서를보여주었다.
"왕국에 계신 왕과 왕비님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습니다. 또한 공주님은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지요. 왕국에선 가족들이 온전한 하루를 함께하며 서로의 마음과 취향을 공유한답니다. 그곳은 가족이라는 환상이 현실로 실현되는 곳입니다. 저희와 함께 떠나시지요. "
새로운 세계로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지만...고개를 돌려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엄마와 아빠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마치 뫼비우스 띠의 앞면과 뒷면 같았다.
영원한 미래를 약속한 대가로 오늘 하루 영원히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길을 택한 사람들 같았다.
'내가 없어지면... 엄마 아빠는 이제 어떻게 사시는 걸까....?'
매일 아침 꼬챙이에 물을 주는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던 엄마 아빠의 따스한 눈빛이 떠올랐다.
두 분의 눈에서 똑같은 모양의 하트를 그려내던 그 순간...둘은 한 사람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엄마 아빠의 소원은....나와 우리 가족이 지금처럼 살을 부비며 함께 사는 것일지도 몰라...'
마음 한 켠으론 위험하지만 스릴 넘치는 여행길로 얼른 떠나버리고 싶었지만...두 발이 바닥에 쩍 들러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초강력 파리 끈끈이에 붙은 파리대왕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 그것 좀 못하면 어때.난 우리 엄마 아빠랑 계속 이곳에 살고 싶은걸. 우린 서로에 해 잘은 모르지만...다른 누구보다도 서로를 아끼며 살아왔잖아...괜찮아!'
바위처럼 무거워진 현관문을 온 힘으로 세차게 밀자 쾅~ 하고 먼지를 날리며 거칠게 닫혔다.
<작가의 더하기>
탐험을 떠난 모험가처럼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잠을 자고있던 은유. 아이의 두 발이 사각 모기장 밖으로 빼꼼히 나왔습니다. 은유네 가족은 에어컨이 없는 시골집에서 시원하게 잘도 잡니다. 아까 할아버지가 장에서 함께 사 오신 마작 대자리 덕분 일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