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서 주로 어떤 도구를 이용하시나요?
“행복은 미덕을 실천하는 삶, 풍요로운 삶, 지극히 즐겁고 안전한 삶, 재물이 풍족하고 육신이 편안한 가운데 그런 것을 지키고 사용할 힘이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 어느 하나 또는 여럿이 합쳐진 것이 행복임은 거의 모두가 동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속의 문장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이 행복의 순간이 조금은 두렵다. 극적인 행복이 지나고 나서 마주해야 할 일상이 무거워 더럭 겁이 난다. 행복의 순간은 대게 조악하고 너무도 빨리 꺼져버리는 생일 케이크에 촛불 같다. 살아내야 하는 삶은 너무도 기나긴데 짧게 타오르는 행복이 상실의 슬픔까지 달고 오니 말이다.
요즘 나는 뜨뜨미지근 한 행복이 좋다. 선풍기로 강풍을 조절하듯 행복의 강도를 조절할 수 있다면 내게 어울리는 풍속은 ‘미풍바람’일 것이다. 아기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입으로 후후~ 불어 식혀주는 정도의 행복감이면 만족하고 살 수 있다. 두려움 없이 일상으로 돌아가 즐겁게 일 할 수 있다. 나는 강렬한 행복이 조금 두렵다.
인생은 꼭 행복해야만 하는 걸까. 아기들은 어렸을 때 “아니”를 먼저 표현한다. 부정적 언어를 통해 본인의 의사를 나태나는 것이다. 살면서 돌이켜 보면 부정적인 감정들은 불편하지만 때론 내게 도움이 되곤 했다.
중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을 성적순으로 무시했다. 어느 날 나는 투표에서 반장으로 뽑혔다. 선생님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말씀하셨다. “쟤는 공부를 못하니까 반장이 될 자질이 없다. 그러니까 이 투표는 무효야, 다시 해.”라고 했다. 우리 반에는 “전교 일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재투표를 하고 또 다시 반장으로 뽑힌 나에게 일그러진 얼굴로 임명장을 집어던지듯 전달했다. 그때 끌어 오르던 열등감과 자존심은 내가 공부를 시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선생님을 향한 경멸의 복수심은 새벽 세시에 눈 비비고 일어나 공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눈가에 물파스를 바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세숫대야에 얼음물을 받아오다 줄 줄 흘려 엄마에게 등짝을 맞기도 했다. 졸린 나와 치열하게 싸웠다. 그렇게 처음으로 성적표에 전교 석차 ’1’ 이라는 숫자를 받게 되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오히려 선생님께 깊이 감사함을 느낀다. 선생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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