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눈발이 내리는 백설기

명치가 쓰리고 소화가 잘 안 되시나요?

by 지각쟁이

그 날은 기록적인 폭설이 내렸다. 머리 위에 털이 수북한 모자를 쓰고 다닐 것 같은 모스크바의 기온이 서울보다 더 따뜻했다. 북극발 한파가 절정에 달했던 것이다. 춥다고 외출을 안 할 수가 있나. 한 해가 가고 나이를 먹을수록 추위에 약해진다. 작은 인형들을 품은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나는 옷을 겹겹이 꺼내입었다. 너무 욕심껏 껴입었는지 바지에 다리통이 꽉 끼었다. 걸음을 걸을수록 자꾸 내려가려고 하는 바지 지퍼와 견디려는 버클의 싸움이 시작됐다. 그런데 어쩐지 껴입은 내복 때문이 아닌 것 같다. 올 겨울 뱃살은 다 코로나 때문이다.


현관문이 열리고 길 위에 나서자 눈이 시큰거렸다. 차디 찬 바람 때문에 한 번. 온 동네를 하얗게 뒤덮은 반짝이는 눈 때문에 한 번. 만기출소자처럼 잔뜩 찡그린 눈으로 서서 바라보는 눈 덮인 세상은 희고 아름다웠다. 매일 걷는 거리인데도 왠지 새로운 시공간으로 이동한 것만 같았다. 소복히 내린 눈을 밟으며 좀 더 걷고 싶어졌다.


간밤에 내린 폭설은 공사장도 쉬게 만들었다. 멈춘 타워 크레인과 장막들이 바람을 맞으며 짐승 같은 소리로 울어댔다. 대낮에 하늘을 울려오는 짐승소리에 어딘가 으스스했다. 하루아침에 달라진 동네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지 고개를 돌리다 서로 눈이 맞았다. 말은 안해도 무슨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미끄러운 고갯길을 오르다 운전을 포기한 차량들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도로 곳곳에 드러누워 있었다. 아이들에게 행복이었던 눈은 어른들의 눈에 더럽고 꼬질꼬질하게 녹아 골칫거리가 되었다.


한 참을 돌아다니다 보니 손가락이 마른 나뭇가지처럼 굳어 뻣뻣했다. 두 손으로 어루만진 두 귀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귀를 만질수록 면도날 같은 통증이 아려왔다. 그때 그 날처럼. 춥고 폭설이 내리는 날이면 나는 왜 그 여자를 떠올리는지 알 수 없다. 무기도 없이 뒤돌아선 나를 향해 칼을 꼽은 여자. 그녀의 존재에 대한 당혹스러움 때문이었는지 동정과 연민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가을 막바지였다. 그 해는 아보카도와 석류가 허름한 과일가게 가판대에 자주 올랐다. 혼자 사는 가구가 많아서인지 하나씩 낱개로도 잘 팔렸다. 딸아이는 복주머니를 닮은 석류를 반으로 갈라 반짝이는 루비들을 털어먹는 걸 좋아했다. 그 날도 석류 하나를 검은 봉지에 담고 달랑달랑 휘두르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갑자기 딸아이가 옷자락을 쭉쭉 잡아당기며 작게 말했다. ‘엄마, 저 할머니 얼굴에 테이프를 무섭게 붙였어...’ 아이의 동공은 포름알데히드 병에 넣어 박제된 듯 무언가에 사로잡혔다. 햇볕에 까맣게 탄 구리빛 피부의 할머니가 길가에 앉아계셨다. 사막위에 모래파도처럼 삶의 풍파가 새기고 간 주름살들, 반질반질 반을 갈라 쪽 진 머리, 얼굴 위를 뒤덮은 반창고가 아니었다면 너무도 평범했을 동네 할머니였다.


‘쪼글쪼글한 입술 위에 하나, 겹쳐진 눈꺼풀에 둘, 접어둔 귓바퀴에 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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