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치가 쓰리고 소화가 잘 안 되시나요?
어린이 날이었다. 책가방을 정리하던 아이가 미역을 내밀었다. 담임선생님께서 반 아이들을 위해 직접 고르신 선물이라고 했다. 아이의 작은 두 손에는 잘 말려진 귀여운 하트모양 미역이 있었다. 그 미역을 받아들자 산후조리를 하며 먹었던 미역국들이 떠올랐다. 홍합미역국, 들깨미역국, 닭고기미역국,..그 시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미역국은 다 먹어본 것 같았다. 산모들이 질리지 않게 메뉴를 고민한 배려가 엿보였다. 그러나 내게는 어쩐지 모두 다 같은 ‘미역국’ 같았다.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에도 평생 먹을 미역국을 전부 다 먹었다는 기분에 조금 신이 났다. 아이를 둘 쯤 낳으니 미역국이 꼴도 보기 싫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미역을 들고 있으려니 코끝이 찡해졌다. 품안에 들어오지도 않던 자그만 생명체가 어느덧 자라서 초등학생이 되었다니 또 다른 감동이 밀려왔다.
오늘은 아이의 생일이다. 산후조리원을 나오며 다시는 미역국을 안 먹어도 될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매년 부지런히 가족들의 생일날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생일 아침이면 어김없이 미역국을 한 솥으로 끓인다. 집안 가득 미역을 들들 볶은 고소한 냄새가 퍼져서 절로 따뜻해졌다. 요즘은 세상에서 내가 끓인 미역국이 제일 맛이 있다. 그동안 열심히 자라 준 딸아이를 위한 미역국을 끓여야겠다.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하트모양 미역이 마냥 신기했다. 요리조리 돌려보다가 커다란 솥에 물을 채워 불렸다. 텅 비어있던 솥에 물을 받으면 창문 위에 토독~토도독 떨어지던 빗소리가 났다. 다른 집안일을 하다가 냄비 앞에 돌아오니 입이 쩍 벌어졌다. 선생님에 사랑을 먹어서인지 몸집을 불린 미역은 한 무더기의 늪지괴물이 되어있었다. 미역을 한웅큼 쥐고 헹구는데 촉촉하고 매끈한 감촉이 부드러웠다. 언제가 한 번 제주도 바다에서 헤엄을 치다가 발등을 휘감고 스치는 미역부락을 만났으면 참 좋겠다.
미역을 손질하다가 어젯밤 아이와 본 다큐멘터리가 떠올랐다. TV 화면 속에는 하늘을 보고 누워 털 고르기 중인 해달이 나타났다. 강아지처럼 복슬하고 촘촘한 털이 나있는 귀여웠다. 해달은 털옷이 있기에 물속에서도 한기를 피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해달에게는 부력을 위한 지방층이 몸에 없었다. 수영에 익숙하지 못한 아기들은 물속에 빠지거나 떠내려 갈 위험에 놓여있었다. 부모 해달들이 먹이를 구하러 나가면 아기는 미역을 몸에 둘둘 말아 온종일 매달려 있는다. 코르크 마개처럼 하루종일 물 위를 둥둥~ 떠있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미역은 아기 해달에게도 인간들에게도 고맙고 소중한 존재였나 보다. 나는 이십대에 독립을 한 후 지금까지 일곱 번의 이사를 했다. 이곳저곳 타지를 떠도는 와중에도 생일날이면 언제나 미역국을 호호 불어 먹으며 가족들을 생각했다. 그때 나는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니면 먼저 생일이라 말하기 어려웠다. 편의점에서 사 온 ‘3분 미역국’을 혼자 끓여 먹은 적도 있었고, 회식자리에 반찬으로 나온 미역국을 남몰래 원샷 하기도 했다. 매년 생일마다 따끈한 미역국을 배에 둘둘 말고 버틴 덕분에 세상 풍파에 휩쓸려 나가지 않고 잘 지낼 수 있었나보다.
이어지는 글과 그림이 궁금하시다면 신간 [엄마의 삶에도 문진표가 있나요?]를 구매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