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책을 더럽게 못 읽는다. 30년을 넘게 살면서 완독한 책이 30권은 되려나 모르겠다.
습관 형성이 안 된 것이라며 유년시절 책을 가까이하지 않은 것을 탓했다. 그러면서 내 아이는 부디 책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기를 바랐다.
소리 나는 장난감 대신 책으로 놀았으면 했고,
엄마 아빠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줘야 아이도 따라 책을 읽는다 하니 책 읽는 척이라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임신 때부터 책 육아하기로 방향을 잡았는데 유독 눈에 띄었던 것은 빼곡히 채워진 다른 집 아이의 책장이었다.
'이렇게 책이 많으니 책을 가까이할 수밖에 없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우리 집 책장도 이렇게 빼곡히 채워가는 모습을 상상했다.
남편과도 책 육아 방향에 대해 상의를 했고 우리는 전집을 들이기로 했다. 90%의 육아용품을 물려받았던 터라 비용을 많이 아꼈는데 아이 교육만큼은 아끼지 말고 투자하자고 했다.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전집을 들이는 것 외에 다른 옵션은 없었고 어느 브랜드의 전집을 들이냐는 선택만 있었다.
'책 육아 = 전집'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렇게 남편과 며칠을 고민하여 전집 브랜드를 결정하고는 맘 카페에서 영사님을 추천받고 직접 전화를 걸었다.
"추천받고 전화드렸어요. 상담받고 싶어요~"
"네~ 제가 댁으로 방문할게요. 내일 낮에 집에 계세요? 댁이 어디세요?"
"아.. 저.. 죄송한데 조금 더 생각해보고 다시 연락드릴게요..!"
기쁜 마음으로 전화를 받고 한 건 해냈다고 설렜을 영사님께는 죄송하지만 구매하기로 결심하고 전화드렸던 그 순간에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격이 너무 사악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 막상 구매하려고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그 가격을 납득할만한 이유를 계속 찾았었다. 전문가들이 머리 맞대어 연구하고 짠 커리큘럼 및 큐레이션 비용, 방문 수업 시스템에 대한 비용이라며 합리화를 했지만 잠시 생각을 다시 해보니 내가 큐레이션을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세상에는 정보가 많이 있고 나에게는 시간이 많지 않은가. 전집이 비싸긴 하지만 비싸기만 하고 실속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간이 많지 않은 부모나 재정적으로 여유가 되는 가정에서는 전집만 한 게 없을 수도 있다. 나에겐 시간이 많으니 직접 큐레이션 해보기로 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직접 큐레이션 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이유는, 사고 싶은 단행본들이 많아서였다. 사실 전집은 구성된 책 하나하나가 맘에 든다기보다는 전체 구성에 매료된 경향이 있었다. 시중에는 훌륭한 단행본이나 소전집이 많이 나와 있는데 전집을 들여도 단행본에 대한 욕심은 못 버릴 것 같았다. 비싼 돈 주고 전집을 구매했는데 내가 단행본, 소전집을 야금야금 사들이는 것은 미니멀리스트인 남편에게는 용납되지 않을 일이었다. 그래서 전집 대신에 질 좋은 단행본으로 우리 집 책장을 채우기로 했다.
나의 책 육아 큐레이션 기준은 이러했다.
1. 대부분의 전집 브랜드에서 내세우는 '다중지능*' 골고루 적용하기
2. 영어책, 한글책 비율을 적절히 섞기
3. 책 구매 목록을 미리 정하여 충동구매하지 않기
* 다중지능: 가드너(H Gardner)의 다중지능 이론에서 말하는 언어지능, 논리-수학 지능, 시각-공간지능, 음악지능, 신체운동 지능, 대인관계 지능, 자기 성찰 지능 및 자연탐구 지능을 가리킴 (네이버 백과사전)
기준에 따라 책을 서칭하고 사고 싶은 책을 리스팅 했다. 이렇게 리스팅을 하면 한 주제에 대해 부족하진 않은지, 과하진 않는지 점검해 볼 수 있고 충동구매를 막을 수 있다.
나 같은 경우는 책 육아하는 맘플루언서들이 공구하는 책들을 보면 팔랑귀가 발동하는 편이다. 아기 그림책인데 엄마가 더 갖고 싶은 쓸데없는 수집욕이 생긴다. 그럴 때마다 나의 리스트를 보면서 이대로 충분하다고 되뇌며 절제한다. 물론 책이 많다고 나쁠 것도 없지만 우리 집의 경제적, 공간적 형편을 고려했을 때 절제가 필요했다.
다른 집 책장과 우리 집 책장을 비교하며 책이 많이 없다고 주눅들 필요는 없는 것 같다.
0-3세 때는 같은 책을 반복적으로 읽어주는 것이 좋고 반복해서 읽어줄 소량의 책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한다. 오히려 너무 많은 책이 진열되어 있으면 아기가 압도되어 뭘 해야 할지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돌 이전에는 엄마가 책을 고르고 샀지만, 아기가 자라서 책 읽는 재미를 느꼈을 때는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스스로 책을 고르게 하고 싶다.
실제로 아기에게 나의 큐레이션대로 적용했을 때, 이 정도 구성도 굉장히 많은듯했다. 생후 2개월부터 책을 보여주기 시작했는데 2-4개월 때는 골고루 보여주었고 4~7개월에는 대근육 발달 시기여서 아기의 관심이 덜했던 것 같다. 8개월부터는 가만 앉아서 다시 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는 확실히 취향이 생긴 듯했다. 같은 책만 반복해서 보는 경향이 있어서 실제로 관심 있게 보는 책은 20권 안팎이었다.
이렇게 단행본 및 소전집으로 큐레이션을 마쳤더니 비용적으로는 결국 전집 비용을 넘어섰지만 엄마의 입맛대로 골고루 구성하니 한 권, 한 권에 애정이 가고 아기에게 읽어줄 때도 그게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에 편안한 책 육아가 가능한 것 같다.
결국 임신 때 노래를 불렀던 전집은 포기하고 우리 가정에 맞는 선택을 해야 했지만 그것이 결핍된 선택이 아니라 다 이유가 있는 선택이었다는 것에 흡족해하며 소신 있는 책 육아를 하고 있다.
각 가정에 맞는 소신 있는 책 육아를 응원한다.
* 커버 이미지 출처: cottonbro 님의 사진, 출처: Pexel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