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사과 100원에 몇 개예요

100원의 소용가치와 엄청난 즐거움

by marina


아주 오래 전의 밤은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불빛조차 찾아보기 힘든 어둠의 거리에서 간혹 자동차 지나는 소리만이 밤의 정적을 깰 뿐 고요가 깃든 대지는 침묵을 고수하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듯했다.

아주 오래전 어린 시절의 기억인지라 어렴풋하긴 하지만 그 시절에 어둠은 일찍이 찾아와 밤이 깊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처럼 번쩍번쩍한 건물들이 들어선 거리도 아니고 어둠 내린 거리에 휘황찬란한 불빛이 있지도 않았으며 어둠이 어둠을 삼켜서인지 플래시 같은 작은 전등 불빛이라도 있지 않으면 사물을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어둠이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 동네 분위기는 차분하고 조용한 하루의 시작은 아니다. 아이들이 많은 동네이다 보니 여기저기 학교로 향하는 발걸음들이 떠들썩하고 부산스러운 출발이다.


오후가 되면 동네는 더 어수선해지고 시끄러우며 아이들 천국이 되어 왁자지껄 조용한 오후 시간은 없다.

저녁 무렵이 되어 날이 어둑어둑해지면 한적한 길목에는 그제야 바람만이 오가는 정적의 시간이 된다.

동네가 다시 떠들썩해지는 시간은 저녁식사를 마친 후 다시 집 밖의 평상에 어른 애 가릴 것 없이 모여들고 하루에 있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으로 각기 다른 일상놀이를 하며 밤의 시간을 즐긴다.


한 편에서는 TV가 있는 집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 당시 TV에서 방영하는 연속극에 심취되어 눈치를 보면서도 그 집을 찾아가 연속극의 스토리 전개에 흥분하며 같이 욕 판을 벌리기도, 눈물 판을 벌이기도, 시원하고 고소한 결말에 박장대소를 하며 왁자지껄한 한 때의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어른이나 애 할 거 없이 저녁 식사 후 이웃집에 마실을 가는 이유 중 하나가 연속극 시청을 위한 것이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고 TV를 가진 이유 하나로 밤이면 동네사람들의 방문으로 어수선한 상황을 겪어야 했으나 그때는 그런 인정들이 통하던 시절이었다.


밤이 이슥해질 즈음이 되면 배가 출출하다는 신호를 보내 사람들은 주로 고구마나 감자등 그 시절에 흔했던 요깃거리를 주로 찾곤 한다. 그리 여유치 않은 살림살이로 먹거리의 종류가 다양하지도 않았고 주머니 사정이 좋지도 않았으며 돈을 지불해야만 살 수 있는 주전부리는 사치로 생각이 되던 시절이었다.

우리 가족의 간식거리로는 남들과도 비슷했지만, 사과나 복숭아 포도 참외등 이런 다양한 과일들은 우리가 농사를 짓거나 외갓집에서 풍족하게 얻어왔기에 남들처럼 주리지 않고 넉넉하게 먹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저장시설이 여의치 않았던 시절인지라 제철에 나오는 과일만 먹을 수 있었지 겨울같이 기나긴 밤의 시간을 저작운동 없이 견뎌내기는 어린 시절의 인내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늘 주전부리거리를 찾아다니곤 했다. 더구나 신나는 방학기간의 기나긴 밤 시간에는.

겨울 사과 생각이 간절해지는 밤이 오면, 작당모의를 하는 우리 어린 삼 남매는 부엌의 찬장이나 항아리 속, 다락방을 샅샅이 뒤지며 우리 모르게 숨겨놓은 맛난 먹거리를 조심조심 찾아다닌다. 찾지 못하면 실망이지만 때때로 성공하여 몰래 먹는 그 짜릿한 맛은 비교할 바가 안되기에 엄마와의 그 눈치싸움은 치열하다.


어린 시절에는 뭘 그렇게 먹고 싶고, 사고 싶은 게 많은지 용돈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기에 우리에게 돈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였다. 일가친척들이 이따금씩 오며 가며 주는 동전은 우리에게 소중한 쌈짓돈이 되었고 그 쌈짓돈이 모여 필요한 것을 사며 흥정을 할 수 있는 용돈이 되었다.


드디어 밤이 어둑해지고 부모님이 잠자리에 드실 시간이 되면 우리는 작전을 세우며 작당 모의를 시작한다. 서로의 주머니를 털어 120원을 갹출하고 그중에 100원은 아삭아삭한 겨울 사과를, 20원은 만화책을 빌리기로 의견을 모으고 야행을 시작한다.

작은 오빠는 만화책을 빌리러 15분 정도의 비교적 먼 거리를 다녀오기로 하고 우리 꼬맹이 자매는 2, 3분 거리의 가까운 시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도둑 걸음으로 집을 나서니 고요가 대지를 삼킨 인적 드문 거리는 우리 가슴을 더 콩닥거리게 하고 무서움으로 몸을 움츠렸지만 그도 잠시 뿐, 흥정을 어떻게 할까나 고민에 빠지다 보니 드디어 시장에 도착이다.


인적이 드문 시간인지라 정적이 흐르는 시장 안은 환한 전깃불만이 외로움을 즐기고 있고, 간혹 늦장을 보러 나온 사람은 총총걸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지곤 하는데 우리 꼬마 둘은 흥정거리를 찾아야 하는 사명이 있기에 열심히 생각을 굴리며 과일가게의 유리문을 연다. 그리곤 머리만 쏙 디밀고는 '아저씨 저 사과 100원에 몇 개예요' 멍석에 쌓여있는 사과를 가리키며 개수를 묻는다.

가게 안으로 몸을 들이면 사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고개만 쭈욱 내밀고는 흥정하는 거다.


지금 생각하면 100원의 가치가 엄청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 시절 화폐의 가치는 100원으로 여러 과일을 살 수 있는 가치를 가지고 있었고 과수농사를 많이 지었기에 과일들도 풍성한 시절이었다.


'100원에 12개' 무심한 듯 우리를 흘깃 보며 답하는 아저씨에게 우리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흥정을 시작한다.

'아저씨 이거 하나만 더 주시면 안 되나요?' 아저씨는 선뜻 그러라며 자리에서 일어나시고 우리는 잽싸게 맛나고 큰 사과를 고르기 위해 손 바쁘게 움직인다.

그리고는 덤을 하나 더 받았다는 흥정의 성공에 기분이 좋아지고, 캄캄한 밤거리를 함께 달리는 검은 봉지의 무게는 이미 가뿐한 가벼움이 된다.


한 겨울의 밤바람을 쐰 탓인지 따끈한 아랫목은 포근한 엄마의 품이 되고, 만화책을 빌리러 간 오빠의 등장을 기다리다 보니 잠시 좋음이 밀려들기도 하지만 오빠의 등장은 졸음도 쫓아버리고 만화책을 볼 준비와 사과의 배분여부에 촉각을 세우며 서로 합리적인 의견을 나눈다.

각자가 좋아하는 만화책을 고르고, 13개의 사과를 4개씩 배분하고, 남는 한 개의 사과는 가위바위보로 이긴 사람이 차지하기로 약속하고 모두 결의를 다지며 가위 바위 보! 꼬맹이 차지가 되었다. 이런 행운은 매번 바뀌기에 별 불만이 없었지만, 아쉬움은 항상 남는 결과였던 것 같다.


드디어 겨울밤의 수고를 즐거움으로 승화시킬 시간, 고요한 방 안에서는 사각사각 사과 먹는 소리와 만화책장 넘기는 소리, 그리고 간혹 킥킥거리는 기괴한 웃음소리로 겨울의 삭막한 밤은 익어가고 새벽이 오도록 그 열정은 계속된다. 그 열정으로 학업에 매진했다면 더 없는 결과를 이뤄냈을 터인데 그만한 성과는 없었다는 것이 지금 내가 서있는 위치가 된다.

이러한 추억의 한 페이지가 크나큰 즐거움과 오늘의 내 그리움이 되었다면, 그 또한 그 나름의 만족감으로 나는 오늘이 마냥 행복하긴 하다.


다만 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는 지금의 시대에 되짚어 보니, 그 시절 화폐 가치에 대한 부러움으로 지금 내가 소유한 가치로 그 시절의 물건들을 사고, 먹고 할 수 있다면, 나는 엄청난 부자이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머금은 미소가 사라지지 않을 만큼.

그러나 보석보다 더 귀한 내 어린 시절의 소환은 그에 못지않은 소중한 가치가 되었음도 인지하며 내가 소유한 만큼만 누리고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겸손한 생각을 더불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