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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Mar 25. 2017

보편성에 대하여

보편적인 아름다움은 이미 무수한 시간을 거쳐 받아들여지고 인식된 아름다움이다.

고착화된 익숙함에서 오는 그 같은 감정들은 편안함을 느끼는 감정과 동일할 텐데, 편안함은 극단적인 해석을 들자면 고여서 이미 썩어버린 것과 같다고도 볼 수 있다.

인류가 이루어낸 문명의 삶 속 깊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아름다움에 썩었다는 표현은 과한 것이겠지만, 그것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관점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에 대한 경계의 관점에서 보는 시각이다.


익숙하고 편안한데서 오는 만족감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을 생각하면 현재에 통용되는 보편적 아름다움은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그 보편성을 획득하기까지의 무수한 시간과, 처음의 낯 섬과 거부감, 또는 충격과 질타 같은 반응들을 생각해보면 지금의 보편적 아름다움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때로 의아하기도 하다.


현대 문명의 삶이 소비와 공급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텐데, 아름다움에 관한 소비와 공급 또한 보편성을 잘 갖춘 것이 그에 걸맞게 활발한 거래를 할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곤 한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되풀이되는 것에 대한 경계의 관점에서 보면 예술작품에서의 보편성은 심각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다수의 대중들은 이미 보편성을 갖춘 아름다움에 익숙하고 그것에 편안함을 느끼지만, 창작활동을 하는 이들이 그 보편성의 달콤함에만 젖어 있다면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이미 고착화된 보편성을 추구하는 예술작품이 여전히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그보다 먼저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의 필요성과 역할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예술가에게 그 보편성은 독이다.

그 보편성을 쫓는 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이고 직무유기일 수 있다.

거기에서 창작의 고통과 딜레마가 시작된다.


단 한 번의 거부감도 없이 당장에 받아들여지고 환대를 받는 예술작품들은 수많은 세월의 억압을 견디고서야 비로소 획득한 보편적 아름다움에 빚을 지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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