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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 Oct 02. 2016

여수여행에서

1.

오랜만에 오른 여행길에 몸이 먼저 반응했을까. 평소에 아무런 문제가 없던 배변활동에 지장이 생겨 화장실을 세 번이나 들락거리는 바람에, 지하철역에 도착하고 보니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서 급히 택시를 탔다.

연로한 택시 기사는 버스 출발시간을 맞출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시간을 되묻고는 당황해했다. 도로 사정에 변수가 없고 정직하게만 간다면 출발시간 전에는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고 여겨졌지만, 아침부터 허둥대다가 급히 올라탄 택시에서 불쑥 나온 질문이었다. 얼핏 봐도 칠십은 훨씬 넘어 보이는 기사는 정작 나보다 더 초조해했고 신호에 걸릴 때마다 안절부절못하며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 혹여 버스를 놓친 다해도 그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일일 텐데 무슨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것처럼 진땀을 빼고 있을까. 법인 택시를 운행하는 걸로 봐서 그저 소일거리로 하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이고, 운전하는 솜씨도 그리 능숙해 보이지 않아 편히 쉴 나이에도 여전히 생계를 위해 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짧은 만남에 보이는 반응으로 노인이 살아온 세월을 감히 가늠할 수는 없겠지만 평생 남에게 큰소리 한번 못 치고, 누구를 속이기는커녕 속고만 살아왔을지도 모른다는 선입견이 생겼고, 그래도 정직과 신용을 밑천으로 지금껏 그런대로 살아왔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고 보니 괜히 미안한 감정이 생겼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신호를 위반하거나 무모한 끼어들기를 감행하지 않을 것이 뻔해 보이는데 불쑥 난감한 질문을 먼저 던진 것이 잘못이었다.

몇 번이나 주황색 신호에서 주저하며 정지 신호에 걸렸고, 그래도 어느 순간 저 멀리 버스터미널이 보일 때쯤엔 노인은 천둥 같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정확히 십 분을 남기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했고 요금을 받기 위해 고개를 돌리는 노인의 얼굴엔 웃음이 가득했다.

아! 정말 인자하게 생기셨구나!

나는 제 시간 안에 도착한 것보다, 노인의 안도의 한숨에 더 안도했다.


2.

유명한, 자살, 억울한 같은 단어들이 잠결에 들리는 듯도 했다. TV 화면에는 유쾌하게 웃는 모습의 사람 좋아 보이는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나왔고 큼지막한 자막이 그의 자살을 알리고 있었다. 놀라움에 눈을 비비는 순간 버스는 터널로 진입했고, 웃다가만 그의 얼굴은 그 상태로 정지해 영면의 길로 접어든 듯 보였다.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을까. 유명한 것은 죽음조차 편하지 못한 것일까. 그의 영정사진도 정지화면처럼 환한 얼굴일까.

잠시 뒤 환한 빛과 함께 화면 속 생전 그의 얼굴은 다시 생기를 찾아 원래의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삶과 죽음은 이토록 근접해 있다.


3.

이미 유명해진 게스트 하우스에는 평일인데도 손님들로 붐볐다. 하룻밤 묶어갈 4인용 도미토리도 예약이 꽉 차 있었는데, 방으로 올라가니 다른 이들의 흔적은 아직 보이지 않았고 아담한 방에 잘 정돈된 이층 침대가 기역자로 놓여 있었다. 밤이면 낯선 이들과 아래위에 누워서 잠을 잘 생각을 하니 기분이 묘했다.

인터넷 후기에 무수히 올라온, 옥상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만큼 정성스레 꾸며진 작은 정원이 있고 곳곳의 인테리어가 늦여름 정취를 즐기기에 제격인 옥상에는, 아마도 또 그와 닮은 사진을 담고 추억을 남기기 위한 이들로 밤이면 붐빌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게스트 하우스 벽면도 곳곳마다 먼저 다녀간 이들이 남긴 메모가 꼼꼼히 적힌  플로라이드 사진들로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꼭 유명 관광지가 아니더라도 식당이든, 거리 담벼락이든 곳곳에서 사람들이 남긴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훗날 우리가 추억이라는 단어를 덧붙이는 것만 빼면 짐승들이 남긴 배설의 흔적이랑 별반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4.

주요 관광지를 순환하는 이층 버스 맨 앞자리에는 막 걸음마를 뗀 듯 보이는 남자아이와, 그보다 한 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 또 다른 남자아이와, 그들의 젊은 부모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 갓 말문이 트인 듯 큰 아이는 끊임없이 ‘아빠, 엄마’를 연발했고, 그때마다 여자는 입술에 손가락만 갖다 댄 채 조용하라는 시늉을 했다. 버스가 출발하자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열심히 수화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별로 놀라지도 않은 체 버스 밖 풍경과 그들의 대화를 번갈아 바라보았는데 정작 그들은 버스 밖 풍경에도, 버스 안 사람들에게도 관심이 없이 간혹 떠드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조용하라는 주의만 주고는 웃음 가득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열심히 수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지막한 도시의 곳곳은 무척 정감 있게 다가왔고, 나는 괜히 안타까워서 그들도 한 번쯤 그 풍경들을 보았으면 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서로의 대화에만 열중했고 아주 잠깐 힐끔, 창밖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이상하게도 나는 버스 밖 풍경보다도 그들에게 더 눈길이 갔다.


5.

역시나 이름만 거창한 벽화마을은 조잡한 그림들로 골목 구석구석을 수놓았는데, 더러 재미있는 작품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그보다는 언덕에 위치한 골목골목을 기웃거리는 재미가 더 쏠쏠했고, 오랜 세월이 만들어냈을 마을 구석구석이 가진 정취를, 어느 날 갑자기 생기기 시작한 벽화들이 오히려 더 반감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조용한 마을에 어느 날부터 무뢰한처럼 찾아와서 꽃받침 한 얼굴 가득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 찍기에 여념 없는 이방인들이 그들은 얼마나 불편할까.

두서없이 따라간 골목의 막다른 곳에 한국 최초의 복싱 챔피언이었다는 김기수 선수가 생전 훈련하던 체육관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낡은 안내판과,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듯한 주변은 황량했고, 먼지 가득한 창문을 통해 들여다본 스무 평 남짓 되어 보이는 체육관 내부는 작은 링 주위로 몇몇 기물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기약 없는 인고의 시간을 보냈을 이곳에, 얼마나 많은 그의 땀과 눈물이 얼룩져 있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6.

바다를 마주한 벤치에 앉은 여인은 연신 눈물을 닦아 냈지만 멈추지 않고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간간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메시지를 보내고, 또 확인을 한 듯한 뒤에는 또 먼 바다를 바라보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 이별을 한 뒤 홀로 바다를 찾은 것인지, 지금 막 이별을 하기 위한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서러움에 우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눈물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색을 띠지 않지만, 눈물이 필연적으로 타고 흘러내리는 얼굴은 제각각 다른 색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


7.

여수의 밤바다는 제2의 버스커 버스커를 꿈꾸는 듯한 이들의 공연이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의 음악 풍과 목소리를 흡사하게 흉내 내는 그룹들도 있었고,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흘러간 옛 노래를 제법 구성지게 부르는 그룹들도 있었다. 대낮부터 지겹도록 들었던 여수 밤바다 노래는 어둑해진 밤까지도 끊임없이 어디선가 들려왔는데, 대중가요가 가진 힘이 이토록 큰 것인 것에 놀랐고 그것에 쉽게 편승하는 관광지의 편협한 행정에 씁쓸했다. 아마도 귀만 잘 기울이고 다녀도 여수에서는 길을 잃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밤이 깊어질수록 밤바다를 따라 들어선 포장마차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붐볐고, 바닷바람을 벗 삼아 나누는 술잔들에는 더할 나위 없는 낭만이 담겨있는 듯 보였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환호성, 폭죽 소리들은 잔잔한 밤바다의 파도소리를 삼켜버렸고 몇몇 낚시꾼들만 깊은 바다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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