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팔 충돌의 시발점 : ‘벨푸어 선언’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민족 국가를 설립하는데 뒷받침 해준 영국의 ‘밸푸어 선언’과 영국의 갈팡질팡 줄다리기 외교의 시작 ‘맥마흔 서한’>
이스라엘에서 벌어지고 있는 반인도적 전쟁에 대한 뉴스가 매일 쏟아지고 있다.
영국 뉴스에서도 반유대, 반팔레스타인 지지자들이 여기저기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어느 편을 들던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지만 영국 총리가 이스라엘 총리를 만난 뒤 입장은 20세기 초반의 ‘벨푸어 선언(Belfour Declaration)’때와 비슷하다. 이스라엘 편을 들어주지만, 그렇다고 아랍이 뒷받침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인도적인 입장은 버릴 수 없는 양립할 수 없는 둘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영국 전체인구의 0.5%남짓 차지하는 유대인. 영국이 유대인에게 끼친 영향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이 왜 시작되었는지 알아보자.
> 이스라엘은 왜 팔레스타인이라고 불리는 땅에 집착할까?
기원전 11세경부터 6세기경까지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은 유대인의 이스라엘/유다 왕국이었다. 그곳에 자신들의 신전을 짓고 초기 유대교를 숭배했다. 신 아시리아와 바빌론 왕국에 의해 차례차례 왕국은 멸망하고, 결국은 ‘바빌론유수’라는 유명한 사건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으로 잡혀가게 된다. 그 후로 유대인의 자치권을 인정한 페르시아에 의해 자신들의 고대왕국으로 돌아가 2번째 신전인 솔로몬 신전을 짓고 재기를 바랐지만 기원전 1세기경 로마제국에 의해 파괴된 후, 많은 유대인들은 그들 고대의 땅을 떠나게 된다.
역사가 말해주듯이 2000년이 가까운 세월 동안 전 세계에 뿔뿔이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뿌리를 잃지 않았고 19세기부터 일어난 극국수주의인‘시오니스트(Zionists)’들에 의해서 잃어버린 자기들의 향토에, 즉 당시 오토만의 지배에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에 다시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는 목적을 설립한다.
> 영국의 애매모호한 줄다리기 외교의 시작: 맥마흔 서한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오토만 제국을 저지하기 위해 아랍인들 끌어들인다. 오토만으로부터 아랍인의 독립을 약속한 ‘맥마흔 서한’으로 아랍인들은 영국을 돕기로 한다.
>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을 세우게 되는 배경: 밸푸어 선언
유대인 시오니스트들은 미국과 영국 등 각국에서 영향력을 미치며 이스라엘의 재건국의 청사진을 그리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아랍을 이용해서 오토만을 재지 하는 한편 유대인의 재정적인 지지를 얻기 위해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대량폭탄 제조에 필요한 부족한 아세톤을 개발해서 영국을 포함한 연합군의 승리에 간접적인 공헌을 한 유대인 과학자 바이츠만은 보상으로 유대인의 나라를 설립하는데 영국정부가 도와줄 것을 요구했고, 그의 이러한 노력과 세계 금융계의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자 시오니스트의 선두였던 ‘로스차일드(Rothschild)’ 재정적인 뒷받침과 로비의 결과로 영국의 외무장관 ‘벨푸어(Belfour)’는 ‘벨푸어 선언’이 담긴 편지를 로스차일드경에게 보내게 된다.
편지의 간략한 내용으로는 “영국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가적 향토(National home)‘을 설립하는 목적을 이루는데 최대한 노력을 쏟고, 팔레스타인에 현존하는 비유대인 그룹의 생존권, 종교의 권리에는 해를 끼치지 않을 것, 또한 다른 나라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권리와 정치 지위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 선언문은 전 세계 유대인 사회에서 시오니즘을 지지하는데 영향을 미쳤고, 간접적으로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 출현의 정당성 부여했다. 또한 맥마흔 서한으로 영국을 믿고 있던 아랍인은 배신감을 느꼈고, 양국의 갈등을 부추겨 현존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기나긴 충돌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후 영국정부는 벨푸어 선언의 오류를 인정했다. 유대인의 의견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지역민의 목소리뿐 아니라 아랍인의 정치적 권리와 보호도 반영되었어야 했다고. 또한 선언문 내의 이스라엘의 ‘국가적 향토(National home)’라는 애매모호한 표현과 비유대인 그룹(아랍인)의 권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는 불가능했던 탁상공론을 펼쳐 아랍과 이스라엘의 끊이지 않는 충돌의 밑바탕이 된다.
> 이스라엘은 언제 설립되었나?
영국은 오토만이 물러간 팔레스타인 지역을 위임통치하게 된다. 그동안 많은 유대인들이 나치의 ‘홀로코스트(Holocaust)’와 여러 박해를 피해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옮겨 오기 시작하면서 아랍인과 유대인의 경쟁구도가 만들어진다. 갈등이 심화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영국은 유대인의 이민을 막기 시작했지만, 유대인들의 반발을 샀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지역을 아랍인과 유대인 지역으로 분할하는 건안을 냈지만, 양쪽 진영 다 찬성하지 않았다. 결국 상향된 경쟁구도로 인해 영국은 1948년 5월 14일 위임통치를 중지하고 떠나게 되고, 1948년 5월 15일 유대인들은 자체적으로 이스라엘의 설립을 공표하게 된다.
>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충돌의 시작
이스라엘 국가설립 와중에 치러졌던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의 결과로 유엔이 제안한 분할보다도 이스라엘의 분할령이 커지게 되고, 결과로 85%의 아랍인이 팔레스타인을 떠나 실향민이 된다. 1967년 2차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웨스트 뱅크(West bank)’ 마저 차지하면서 그 지역 아랍인들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통제안에 머물게 된다. 또한 아랍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의도적으로 낮아지게 된다.
1987년 참다못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민중봉기 ’인티파다(Intifada)’가 일어난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자유 연맹(PLO)’은 쌍방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고, 평화협정을 맺는다. 하지만 상황은 더 좋아지지 않았다.
2000년 2차 민중봉기의 결과로 팔레스타인이 ‘가자지역(Gaza)’ 웨스트 뱅크의 통제권을 가져오게 되고, 2007년 ‘하마스(Hamas)’가 가자지역의 정권을 쥐게 되면서 무력 충돌은 심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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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영국 상황은 벨푸어 선언 당시와 비슷한 것 같다.
영향력 있는 영국의 공영방송이 선택하는 단어 하나에 따라 이스라엘 지지자들과 팔레스타인 지지자들의 지탄을 받는 예민한 위치에 있다.
과거의 실수는 다시 범하지 말고, 21세기답게 정치적인 득실보다 선진국으로서 인도적인 측면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결국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둘 다 어떠한 이유의 합리성도 적용될 수 없는 비인도적인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