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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무드 Mar 09. 2020

쓰고, 지우다

때로는 지우는 것이 더 중요하기도 하지 [마무드에세이, 9]


지금까지 짧은 삶을 살아오면서 나의 생각이나 말을 지워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지우면서 살아야겠다고 글을 쓰면서 배운다.


 글을 쓰면서 쓰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지우는 것이라는 걸 느꼈다. 그리고 때로는 쓰는 것보다 지우는 것이 더 중요한 순간이 있기도 한다는 것 역시. 글을 아무리 한 번에 쭉 잘 써 내려가도 다시 읽다 보면 지우고 다듬어야 할 부분이 계속 생긴다. 그래도 다 나의 생각이 담긴 한 자 한 자인데, 하며 소중하게 생각해봐야 글이 어지러워질 뿐이다. 지우면 더 좋은 글이 될 때가 있다. 글을 쓰는 것도 이런데 나의 삶은 어떠했나 생각해본다. 내 삶은 지우는 과정을 거친 적이 있나. 지우면 더 좋은 삶일 수 있었는데 지우지 못했던 적은 없었나.


 지우다. 계속해서 ‘지우다’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니 단어에 괴리감이 느껴진다. 언제부터 ‘지우다’가 ‘지우다’의 의미를 갖고 있었는지 또 엉뚱한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엉뚱한 생각은 잠시 저편으로 접어두고 글을 쓰는 것에 집중한다. 이런 것이 지우는 것이다. 나는 방금 나의 엉뚱한 생각을 지웠다. 마치 지우개로 지우듯이. 하지만 연필로 써진 글을 지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아무리 좋은 지우개라도 꾹꾹 눌러 담은 글씨의 흔적까지 없애지는 못한다. 또렷한 존재는 없어지지만 언제고 다시 꺼내올 수 있는 흔적이 남아있는 것. 지우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내 인생에서 저절로 바래진 글씨는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 지운 글씨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계속해서 생각이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잠이 안 오는 밤이면 날마다 생각에 생각이 길게 늘어뜨린 리본처럼 묶여 계속해서 길어지는 것이 그런 탓일까. 그 생각들이 나를 힘들게 했을 때, 나는 왜 한 번도 지워보려고 시도하지 않았는지 떠올려본다. 아마도 나는 나 스스로 그것을 지워버리면 영영 없어져버리는 건 아닐까, 걱정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직 나는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때에 지워버리면 큰 후회가 나를 사로잡을까 두려워 지우지 못했다. 지워도 흔적이 남을 것들은 영영 남는다는 것을 잊고 말이다.


 소중한 것일수록 마음에 꾹꾹 눌러 담는다. 그것을 지우개로 지워봤자 모든 것이 없어질 리 없다. 내가 소중하게 눌러 담아 썼으니 분명 흔적이 남을 것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이 사실이 가끔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날 더 아프게 하기도 한다. 지워도 흔적이 남아 계속해서 내 마음을 아려올 테니.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을 잃었지만 잊고 싶지는 않은 마음.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이미 내 가슴에는 그것의 흔적이 남아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니 이제는 지우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지금의 나, 현재의 나에게 중요한 것들을 남겨놓고 나머지는 지워보는 게 어떨까 생각해본다. 분명 그 지우는 과정은 다시 한번 아물었던 상처의 딱지를 떼는 일 일수 있다. 하지만 곧 다시 아물고, 딱지도 저절로 떨어지는 시간이 찾아올 것이다. 깊은 상처는 다 나아도 흔적이 남겠지만, 그 흔적으로 이따금씩 기억하고 추억해볼 수 있는 것 아닐까.

 당장 이 글을 다 쓰고 난 뒤 나의 마음을 지우는 일부터 해봐야겠다. 부디 어지럽혀져 있는 마음을 정돈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조금 더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삶의 길을 사뿐사뿐 걸어갈 수 있는 내가 되길 바라본다. 그리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뿐만이 아닌, 당신도. 힘겨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을 이 시간, 각자의 공간에서 여러 가지 날 괴롭히는 것들을 지워내 내일 아침에는 걱정과 생각의 무게를 덜어내고 사뿐사뿐, 걸어 나갈 수 있는 당신이길 바라며 이 시간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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