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무드 May 07. 2020

정신적 독립을 할 때가 됐는 걸.

엄마, 우리 각자 인생 살자. [마무드 에세이, 14]


있어도 문제, 없어도 문제인 것은 부모 입장에서의 자식뿐만이 아니다. 자식 입장에서의 부모 또한 마찬가지다.


 독립이란 무엇일까. 독립은 신체적인 독립만이 독립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에게는 신체적 독립보다 정신적이 독립이 훨씬 중요하다.

 나는 매우 독립적인 성향의 사람이다. 뭐든 나 혼자 하는 것이 습관 되어있고 나 혼자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이 편하다. 물론 내가 장녀이라는 이유도 한 몫했지만 그보다 더 확실하고 분명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의 거의 모든 시간에 엄마가 없었다. 이혼가정이라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리 부모님은 사이가 아주 좋으셨고 여전히 좋으시다. 그런데도 내 초등학교 시절 나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엄마가 나의 시간에 없었던 이유는 엄마가 유학을 다녀왔기 때문이었다. 8살의 나와 5살의 동생을 아빠와 함께 집에 남겨두고 우리 엄마는 프랑스로 떠났다. 나는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엄마도 엄마 인생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는 그렇게 자신의 인생을 살아가는 엄마가 자랑스럽기 때문이다. 나는 엄마는 엄마다워야 한다는 그런 폭력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의 나는 그게 어쩌면 내 인생에 아주 큰 구멍을 남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엄마가 나를 두고 떠났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힘들어하고 피해의식이 생긴 것은 아니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요즘 나에게 어쩌면 ‘집착’까지 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엄마가 절실히 필요할 때는 그때였다. 내가 초등학생이고 아래에 다섯 살배기 동생을 뒀으며 엄마가 없을 때는 내가 엄마라는 소리를 듣고 살던 때. 그때였다. 그때 나는 엄마가 절실히 필요했고 반대로 그때의 경험 덕분에 나는 그 누구에게 의존하는 것보다는 뭐든지 혼자 스스로 하려고 하는 독립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애어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으며 나 혼자 생각하고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것이 그 누구보다 익숙한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렇게 살아온 나를 부정이라도 하는 듯, 우리 엄마는 내 인생에 ‘개입’하려고 한다.


 글쎄, 나는 결혼을 해보지도 않았고 아이를 낳아보지도 않아서 나의 아이가 생긴다면 어떤 감정일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내 뱃속에서 나왔을 지라도 그 아이 역시 자기만의 삶이 있고 언젠가는 내 곁을 떠나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게 스물세 살의 정신적 독립을 원하는 한 철없는 아이의 생각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엄마가 나를 걱정하는 것 까지는 내가 거부하거나 싫어할 수 없다. 그리고 충분히 이해한다. 분명히 우리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우리 엄마는 엄마이고, 나는 엄마의 딸이니까. 나를 열 달 동안 뱃속에 소중하게 품고 낳을 때도 엄청난 고통을 통해 낳았을 테니까.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나 역시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걱정’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걱정의 범위는 그 사람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고 계속해서 옆에서 함께 걸어가 줄 수 있는 게 아닌 이상 그 사람의 인생에 개입하거나 참견하지 않고 위태로워 보일 때 정말 필요한 조언이나 위로를 건네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 여기서 어떤 한 사람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고 계속해서 옆에서 함께 걸어가 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기나 할까? 그게 부모님과 자식 관계일지라도 애초에 가능한 일인가?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찾아 홀로 걸어갈 준비를 하고 결국에는 홀로 걸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적 독립’은 사람에게 필수요건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엄마만 그러는 것인지, 다른 부모님들도 그러시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우리 엄마는 내가 정신적 독립을 이미 한지 오래인 하나의 개인 인격체라는 것을 아직까지 인정하지 못하는 듯하다. 우리 엄마는 나를 걱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내 인생에 자꾸만 발을 들이려고 하고 비집고 들어와 나를 조종하려고 한다는 느낌까지 들게 한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너무나도 힘들게 한다. 나는 이미 아주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정신적 독립을 해버렸고 그게 익숙해진 사람이며 그것을 넘어 나는 그냥 그런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내 인생에 개입이라니. 늦어도 너무 늦은 건 아닐까. 나는 이미 이렇게 굳어버렸는데 말이다.


 이 글이, 그리고 나의 생각이 너무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을 수 있다는 반성이 잠시 찾아온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굳건하게 나의 생각과 의견을 말할 수 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고, 엄마와 나의 인생은 하나로 묶일 수 없다는 것. 그렇기에 걱정은 당연하게 찾아오는 것이고 그를 이해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것은 도저히 나의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것.


 요즘 엄마의 걱정이라는 명목 하에 있는 내 인생에 개입하려고 하는 엄마와 나는 여러 번 다퉜다. 하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엄마는 우리 엄마고, 나는 엄마의 딸이라는 것. 그리고 언제나 사랑한다는 것이다. 미울 때도 있고 엄마의 행동과 말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는 때가 있지만 분명히 할 것은 나는 엄마를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 엄마도 나는 사랑하기에 그럴 것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짐작이 간다.


 하지만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에도 서로의 인생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고 생각한다.

 나는 내가 아이를 낳는다면 절대 우리 엄마처럼 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을 하며 살고 싶지 않다. 오히려 나도 우리 엄마처럼 내 자식에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살고 싶다. 부디 그렇게 되길 기도하며 글을 정리해본다.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엄마를 사랑할 것이고 사랑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뿐만이 아닌 이 세상 모든 부모와 자식이 서로를 닮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서로에게서 정신적 독립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본래 반짝이는 것이 반짝이는 것 옆에 있으면 둘 다 조금은 덜 반짝이게 보이기 마련 아닐까.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둘 다 제대로 빛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딱 그 정도의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나와 우리 엄마, 그리고 모두가 되길 기도하며 글을 마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어떤 의미로 남고싶은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