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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뷰몽땅 Nov 09. 2024

중년의 사랑. 노년의 로맨스

나이 먹은 사람들의 썸타기



비가 옵니다. 며칠 전부터 부슬부슬 비가 오네요. 

뭐 그리 할 일이 많은 건 아니지만 비만 오면 나는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습니다. 

널어놓은 빨래도 걷을 생각 않고. 씽크대 가득 쌓여있는 설거지 꺼리들도 내버려두고. 

그냥 나는 창밖만 보네요. 


보고 있으면 별의 별 일들이 다 떠오릅니다. 

열 몇 살적 이야기도 떠오르고 며칠 전 옆집 할마씨랑 고스톱 쳤던 일도 떠오릅니다. 

그러고 앉았으면 시간이 참 묘하게도 후딱 지나가 버려요. 고맙지요. 

나이 들어 가장 힘든 게 뭐냐고 묻는다면 하루가 어찌나 지겹고 긴지. 

새벽부터 눈을 뜨고 앉아서 실컷 책을 읽고 시계를 봐도 아직 새벽 너덧시. 

그리고 일어나 냄비들을 죄다 꺼내어 닦고 나도, 

이 방송 저 방송 돌아가며 아침 드라마를 다 보고 나도, 

이놈의 아침시간은 아직도 제자리지요. 


혼자서 먹는 밥이니 시간 맞춰 먹을 일도 없고 

혼자서 사는 집이니 먼지 하나 없이 닦아 봐도 소용없고 

나이가 들면 참 시간이 어찌나 더딘지 그 놈의 시간 때문에 늘 머리가 아파요. 

남들처럼 시간 죽이고 있지 말고 뭐라도 배워 보라고 하지만 

나처럼 사람들 대하는 게 껄끄러운 사람은 나가서도 별 재미가 없답니다. 

오히려 이 사람 저 사람 만나 이야기 하고 있으면 더 머리만 아프지요. 


그런데 이렇게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온 세상 사람들이 몽땅 자리를 틀어앉고 있으니 얼마나 좋아요. 

늘 붐비는 거리를 보면서 문득문득 들었던 혼자라는 느낌이 

이런 날이면 싹 사라져 버립니다. 

남들은 비가 오면 외롭다는데 나는 비만 오면 살맛이 나요. 

쥐 죽은 듯이 조용한 세상을 보는 것 같아 기분이 좋구요 

무엇보다 비 오는 날은 다들 혼자서 걸으니까요. 우산을 쓰고 붙어 다니기란 참 귀찮지요.

그러니 나한테는 비오는 날이 좋을 수 밖에요. 늙어서 주책이라구요? 

늙으면 여자 아닌가요? 늙어도 여자는 여잡니다. 늙어도 남자가 남자이듯이요. 


커피 내리는 냄새가 참 좋습니다. 

비도 오고 커피도 마시고 좋아하는 노래도 들을 수 있으니 

오늘은 참 팔자가 늘어진 날이네요.

당신도...보고 있겠죠? 비 오는 날을 즐기고 있나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요..

참 세상은 재밌는 것입니다.


김치전이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아 묵혀둔 김치를 꺼냈습니다. 

젊었을 때부터 요리 솜씨가 별로여서 

누구 앞에서 요리를 한다는게 저에겐 참 어려운 일이었지요. 

집에 손님이라고는 올 일도 없었지만 

누구라도 올라치면 요리를 할 생각 따위는 하질 않았어요. 

그냥 나가서 먹거나 뭐라도 시켜 먹지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한 요리를 내놓질 못했어요. 

챙피하기도 했지만 이렇다 저렇다 말 듣는게 너무 부끄러웠지요. 

나이 들어가면서 그게 점점 더해지는데 

그래도 내 손이 내 딸이라는 우리 엄마의 말이 맞나봐요. 

뭐든 나가서 먹고 시켜 먹는 것 보다는 

대충 맛이 있든 없든 내가 해 먹는 밥이 내 입에는 젤 맞네요.


기억하세요? 당신이 처음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이렇게 비가 왔지요. 

그냥 지나가는 길인데 나와서 차라도 한잔 하지 않겠냐고. 

그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당신을 집으로 초대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네요. 

혼자 사는 여자 집에 남자를 들인다는 건 

요즘 세상에는 그다지 어색한 일도 아니지만 

나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내뱉는다는 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지요. 


하지만 그날은 그래야만 할 것 같았지요. 당신도 참 당황스러워 했던 것 같아요. 

어디에 앉아야 할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내 눈도 쳐다보질 못하고 

그렇게 거실 여기저기를 서성이다 베란다 한 켠에서 죽어가고 있는 화초 하나를 보았지요. 왜 이런걸 여기다 두냐고 하셨던가요. 아니면 왜 이렇게 죽여가고 있냐고 하셨던가요. 

나도 적지 않게 당황을 하여서 그때 당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른 체 

얼른 그 화분을 한켠으로 밀어놓으며 살아날거예요. 라는 말만 했습니다. 

그 말이 그렇게 이쁘게 들리셨는지 당신은 두고두고 그 말을 하셨지요. 

작은 화초 하나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라 더 이뻐 보인다 하셨지요. 


글쎄요. 그것이 생명이 있어서 버리지 못했다기보다 

어쩌면 나는 귀찮아서 그냥 그렇게 내버려 두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에게 그렇게 말 할 수는 없었지요. 

벌써 흰머리카락이 희끗희끗 참 많이도 돋아나는 나이였는데 

나는 당신 앞에서 소녀처럼 보이고 싶었지요. 

단 한 순간도 당신 앞에서 늙어가는 여자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서둘러 커피를 내렸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역시 이 집에서 보는 비 오는 거리는 정말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웠습니다. 

당신과 나는 그렇게 커피를 마시면서 서로 아무말도 않고 창밖만 보았지요. 

무엇을 해야할 지도 몰랐고 어떻게 해야할 지도 몰랐지요. 

지겨운 침묵이 어색하여 당신이 먼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습니다. 

이런 날에 찌짐이라도 한장 부쳐먹어야 제맛인데.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너무 오래되어 군둥내까지 나는 김치를 꺼내었습니다. 

당신도 웃으며 그 옆으로 왔고 우리는 그렇게 김치전 몇 장을 부쳐가며 금새 먹어버렸지요.

어색함이 참으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우리는 마치 열 몇살 소년 소녀처럼 까르르 웃어가며 참 맛나게도 먹었지요. 


그때 알았지요.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될거란걸.. 

사랑이...나이 먹어 이제는 굳어버린 줄 알았던 내 가슴을 

그렇게 흔들어 놓을줄은 몰랐습니다.

아니..모른척 살았지요..다시 그런 가슴 떨림은 없을 줄 알았지요. 

그리될 줄 알고 그 날 비가 왔을까요. 

그리될 줄 알고 그 날 내가 당신을 집으로 오라 했을까요. 

그리될 줄 알고 당신은 뜬금없이 찌짐이라도 먹자고 했을까요. 

아니 당신도 나도 그리될 줄 몰랐을 겁니다. 

당신도 나도 우리는 너무 조심스러웠지요. 다시 사람에게 상처 입을까 너무 두려웠지요. 


혼자 앉아 김치전을 먹자니 참 처량한 생각이 듭니다. 

몇 장 부쳐 옆집에나 갖다줄까 싶어요. 좋아할까요. 귀찮아할까 걱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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