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꼭 안아줄게
민수에게 말을 하는 게 좋을까. 그냥 모르는 채 버려두는 게 좋을까.
민정은 골치가 아파졌다. 왜 내 인생에 이런 일이 생기는거지?
드라마 주인공처럼 살고 싶은 꿈은 누구에게나 있다.
실장님이 나타나서 반지하 방에 사는 여자를 구해주는 꿈.
그런 일이 생겼다면 그나마 하루에 두 시간씩 잠도 안자고 꼬박꼬박
드라마를 보기를 잘했다고 했을텐데. 민정에게는 막장 드라마 같은 일이 생겼다.
민수 아버지는 꽤 멋진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성공한 사업가는 아니더라도
그 비스무리하기는 했다. 깔끔하게 차려 입는다고는 했지만 괜히 기가 죽었다.
빤히 아래위로 훑어보는 눈길이 거북했다. 하지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질문은 뻔했다. 이런 질문을 받을거라고 미리 상상을 했었다. 그런데도 당황스러웠다.
하는 일은 뭔가. 부모님은 뭘 하시는가. 어디에서 사는가.
민정은 백수였다. 하루에도 몇 개의 알바를 하느라 고단했다. 하지만 돈은 늘 모자랐다.
부모님은 알다시피 없다. 알고 계셨을텐데. 굳이 콕 집어서 묻는 의미를 모르는 건 아니다.
반지하에 산다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 말까지 했다면 더 기겁하셨을테다. 나름의 배려였다.
평소라면 숨 가쁘게 올라갔을 오르막길이지만 오늘만큼은 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민수가 장을 봐왔다며 카톡을 보냈다. 부대찌개를 끓이겠단다. 소주도 사왔단다.
민정은 문득 마음이 가벼워졌다. 알고 있나보다. 그렇다면 좀 더 쉽게 성질을 부릴수도 있겠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화를 내지 않아도 되겠다 싶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지?
민정은 마음이 왔다갔다 했다. 민수와 헤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민수가 더 능력있는
사람이길 바랬다. 이기적인 마음이었다. 나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민수가 되기를.
그의 아버지가 돌아오셨다고 했을 때 민정은 한가닥의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모든 희망이
밝고 따사롭지는 않다. 어떤 이에게 희망은 부질없다. 오히려 더 큰 좌절을 안겨다줄뿐.
다시 카톡이 울렸다. 언제 와?
냄새가 빠져나가라고 창문을 열어 놓았다. 평소라면 도로변에 접한 민정의 집 부엌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을 것이다. 꼼꼼하게 잠금 장치를 설치했고 하얀색의 커튼까지 달아놓았다.
술 취한 사람들은 반지하 창문에 오줌 휘갈기는 것을 좋아한다. 희열감을 느끼는 걸까.
아침에 일어나면 민정은 전기 주전자에 물을 끓였다. 그리고 락스와 뜨거운 물을 들고
밖으로 나와 창문에 뿌리고 말끔히 닦아 냈다. 어젯밤에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그대로 두면 그녀의 인생이 더욱 시궁창 속으로 빠져들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창문이 열려 있었다. 민정은 한참동안 서서 내려다 보았다. 급기야는 쪼그리고 앉아
고개를 들이밀고 그 안에서 민수가 무엇을 하는지 찾아보았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매콤하고 맛있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배가 고팠다. 그러고 보니 오늘도 종일 굶었구나.
하얀 쌀밥에 발간 국물을 올리고 슥슥 비볐다. 큼직한 돼지고기를 올리고 크게 한 입 먹으면
행복했다. 먹으면 먹을수록 배가 고팠다. 한그릇을 후딱 비웠다. 입맛을 다시며 남아있는 찌개는
새 숟가락으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다시 팔팔 끓여 식힌 후 냉장고에 넣었다.
그 때까지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맛있다고 했던가. 맛있냐고 했던가.
서로의 눈도 쳐다보지 않았고 만날 때마다 하던 말싸움도 없었다.
설거지를 마친 민수가 식탁 앞에 다시 앉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민정은
자동적으로 그 앞에 앉았다. 축축한 머리칼은 수건으로 감쌌다. 민수는 향을 피웠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냄새가 잘 빠지지 않는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늦은 밤이었다. 그 때 전화벨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민정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 좀 받아. 시끄러워.
민수는 길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시 고요가 퍼졌다.
참다 못한 민정이 먼저 말했다. 어떻게 할까?
그런 민정을 빤히 쳐다보는 민수는 피식 웃엇다. 웃어?
뭘 어떻게 해. 이제 자야지. 너무 늦게 밥 먹었으니까 나가서 산책이라도 할까.
머리 말리고 나가서 좀 걷자. 그리고 들어와서 자자. 내가 오늘 꼭 안아줄게.
갑자기 민정은 울음이 터졌다. 하루 종일 참았던 울음이었다.
그랬다. 민정은 오늘 누군가 자신을 꼭 안아주기를 바라고 바랬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