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차_<일신수필>, 인간 자체를 진리화하지 말라

200년 전 고전 <열하일기>가 주는 현재적 가치는 무엇일까?

by 땅콩

조선 문집들에는 앞머리에는 들어가는 글, '머리말'에 해당하는 '서'가 있다. 열하일기 들어가기 전에 <열하일기서>가 있었고 도강록에 이어 일신수필에도 머리말이 있다. <일신수필서>는 특히 한줄기로만 굳어진 조선 지식인에 대한 답답함과 함께 존재의 덧없음에 대한 느낌표들이 눈에 자주 띈다.


서양문화의 뿌리가 그리스-로마 신화에 있듯이 한국, 동아시아 문화 뿌리는 중국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려시대 이래로 우리나라는 오로지 유교를 숭상하고 예악 문물이 모두 중국의 제도를 본받았기에 예로부터 작은 중국이라는 뜻의 '소중화'라는 호칭이 있다*고 연암이 말할 만큼 우리 뿌리는 중국과 맞닿아 있고 그 안에는 공자가 굳게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않고 한갓 남이 말하는 내용만 듣고 의존하는 사람과는 함께 학문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하물며 생각이나 상상, 학식과 도량이 평생토록 미치지 못하는 것에 있어서랴! 그런 사람들에게 공자가 태산에 올라서 천하를 작게 여겼다고 말하면 마음속으로는 정말 그랬을까 하고 부정하면서도 입으로는 '그랬겠지'하고 응답할 것이다. 또 그런 사람들에게, 석가는 시방세계를 평등하게 보았다고 말하면 꿈같은 망언을 한다고 배척할 것이며, 서양사람들은 큰 배를 타고 둥근 지구 저편에서 멀리 빙빙 돌아서 동양으로 왔다고 말하면 괴상한 거짓말을 한다고 도리어 말하는 사람을 꾸짖을 것이다. 이런 지경이니, 나는 이제 누구와 함께 천지 사아의 크나큰 구경거리를 이야기하겠는가?


공자를 꼭대기에 두고, 공자가 한 말이면 모든 것을 진리로 여기고 결국 공자라는 인간 자체를 '진리화'해버리는 조선 사대부들. 곳곳에서 부는 근대화 바람을 느낀 연암에게 조선이 얼마나 좁은 땅이었을지 말로 해서 무엇하랴.


나는 우리 고장에 있는 덕포진에 자주 놀러 간다. 덕포진은 강화도를 마주 보는 강화해협에서 일어났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치른 군사주둔지이다. 연암이 열하일기를 썼던 1780년, 그로부터 100여 년 뒤 1871년에 미국이 함대 몇 척을 끌고 와서 사흘 만에 조선 수비 병력 대다수를 섬멸하고 광성보가 함락당한 아픈 역사의 현장이다. 역사관에서 현장 사진설명을 보면 조선군대는 총알을 막아보려 아홉 겹의 솜을 넣은 원단으로 조끼를 만들어 입었을 정도로 지식도 장비도 대비도 형편없었다.(당연히 총알은 그 조끼를 뚫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의 결과였고 백성들은 총알받이가 되었다.

학교 다닐 때 국사시간에 만난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꽤나 멋진 정책, 조선의 자존심을 지킨 나름의 신조, 이유 있는 고집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교과서가 시키는 대로 생각했던 청소년이었다. 이렇게 나 같은 역사 문외한이 얼마나 많을까? 나는 가끔 조선 자체를 부정하고픈 생각이 일어서 괴롭다. 아니 조선 대신들, 왕부터 유생들, 공부 좀 했다는 지식인들에게 너무나 많은 답답함을 느낀다.


조총으로 무장한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 배우는 조선이었으면 했다. 오랑캐 놈들이 세운 청나라여도 기술과 이로움을 일단 배워 힘을 키우는 조선이었으면 했다. 남들에 의한 근대화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근대화였다면 어땠을까? 지금 나는 열하일기에서 어떤 현재적 가치를 찾을 것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더불어 더 이상 이런 실수를 반복하는 국가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조선을 배우면서 절감한다.


연암은 <일신 수필> 편에서 '수레 제도'라고 따로 제목을 낼만큼 중국에서 본 수레들의 종류와 모양, 쓰임새를 자세하게 적어놓았다. 조선에선 수레바퀴를 제대로 만들지 못해 굴러가기 힘드니 오히려 사용을 덜하는데 반해 중국의 수레들은 못 가는데 없이 사람들을 양옆으로 태울 수 있는 수레까지... 조선사람 연암 눈이 얼마나 동그래졌겠는가! 길에 두줄로 난 수레바퀴 자국은 수렛길이 되었고 수레를 연구하고 응용해 벼를 찧는 방아, 실 잣는 기계까지 고안해낸다. 수레 덕분에 교역이 활발해지고 상업이 발달 하게 된다. 더욱이 모든 것을 하나하나 손품을 팔아야 했던 아녀자들을 벼 찧고 실잣는 단순 노동에서 벗어나게 했다는 것이 낭독 모임에서 화두로 떠올랐다.

왼쪽 1894년 개화기 서울, 수레도 수렛길도 보이지 않는다. / 오른쪽 청나라 독륜차(열하일기 282쪽 사진)

우리 할머니 세대만 해도 밥할 때마다 절구에 나락 찧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중국에선 이미 여자들이 그런 단순노동에서 벗어난 것이다. 청나라 방앗간에는 기계 앞에 사내들이 지키고 앉아 다루면서 방아 찧고 실잣는 일을 남자일로 만든 것! 우리는 기술이 가져온 대단한 성과라고 여겼다.


자연스럽게 그 당시 '마님'들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는데 오죽헌에 다녀온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오죽헌을 둘러보니 그 경치가 수려하고 규모 또한 크던데 부모에게 유산까지 물려받은 신사임당이 글과 그림, 아이들을 직접 공부시킨 데에는 다 환경이 뒷받침되니까 가능했던 게 아닐까?"라고......

"신사임당 집안이 일단 먹고살 걱정은 안 해도 되는 양반집이다 보니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을 이겨내고 뭔가를 이루었다고 하기엔 좀 그렇죠"라는 의견을 주신 분도 계셨다.


마침 나도 몇 주 전에 강릉여행을 다녀왔던 참이다. 함께 간 지인이 오죽헌에서 "신사임당이 5만 원 지폐에 오를만한 인물인가?"라고 반문을 하셨다.


신사임당에게 오죽헌이 없었고 율곡 이이라는 아들이 없었다면 그래도 그녀는 높이 평가될 수 있었을까?
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은 그저 공부에 전념하고 학식이 높지 백성들을 위해 뭔가 이루었다거나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였는가?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처럼)
차라리 독립만세를 외치며 감옥에서 죽은 유관순이 더 대단한 것이 아닌가?

라는 그분 물음에 오죽헌 역사관을 꼼꼼히 읽고 와서 대답해주리라 했던 내 말문은 막히고 말았다. 그래서 낭독 모임에서 이 질문을 쏟아놓았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조선시대는 여인이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고 치자. 조선시대 열악한 여성의 위치는 이 정도만 되어도 위인이 되는 시대였을 테지. 지폐 속 모든 인물이 조선시대 인물인데 일제강점기나 현대사 인물 가운데 신사임당보다 나은 인물이 없었을까? 없어도 안타깝고 있어도(못 찾았으니) 안타까운 현실이다. 결국 신사임당은 '현모양처'라는 역할을 잘 수행해 냈기에 모범상이 된 것인데 지난 세기 동안 여자의 모범상은 참으로 고정 불변했구나 싶어서 모두들 씁쓸해했다.

또한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고 학식이 높고 후학을 길러 유생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두 인물(율곡 이이와 퇴계 이황)이 현시대에 와서 '인간 자체로 진리화'되는 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중세시대 조선에서 너무 급격하게 현대사로 넘어와 버려서 나는 불과 200년 전이 1000년도 넘은 삼국시대 같이 느껴진다. 도대체가 그 옛날 옛적에 가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근현대사의 산물이기만 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이제 궁금하다. 조선이 궁금하고, 조선이 있기 전 고려가 궁금하고, 그 시대 지식인을 지배한 중국 텍스트가 어땠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요컨대 고전의 현재적 가치를 찾는 문제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인데, 우리는 텍스트의 정독을 통해 "있었던 세계 그리고 있는 세계에 대한 비판과 통찰을 통해서 있어야 할 세계를 전망하고 모색한 것이 열하일기의 진정한 주제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 열하일기 1 역자 서문 2에서 발췌




* 열하일기 2권 15쪽 원문을 그대로 옮겼다.




※ 많이 부족합니다. 틀린 내용, 역사적 사실이 바르지 않은 내용은 지체 없이 지적해주시고, 다양한 의견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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