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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Jan 21. 2021

오늘 밤에 자기소개 한 줄 생각해서 알려주세요.

직업 나이 이런 거 안 알려도 되고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한 문장이요

한 달 전 일이다. 급하게 독서토론 마감 원고를 치던 이선생님이 단톡방에 자기소개글을 올려달라고 했다.

"헉...열심히 고민해서 자정 전에 남기겠습니다"

SNS를 하는 사람이라면 소개글 정도야 어려울 것 없지. 하면서 공책을 딱 펴고 앉았는데 고민하다가 자정을 10분이나 넘기고서야 글을 넘겼다. 길어봐야 두줄 될 글을 3시간이나 고민하다니... 나란 존재는 정녕 나 하나조차도 소개하기를 어려워하는 것인가.


한 달이 지나고 드디어 열하일기 토론한 내용이 글로 나왔다. 맨 아래 토론참여자를 소개하는 부분을 읽어보았다.


  매일 달리고, 채식을 하며 책을 읽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입니다.


내 사진 아래 달린 소개글을 보고 깜짝 놀라서 단톡방에 말했다.


"선생님, 저 매일 달리지 않는데... 이틀에 한번 정도밖에 못 달려요."

"에이... 너무 꼼꼼히 보시진 말고요ㅎㅎㅎ 완전 사기를 치면 안 되지만 적절히 편집할 여유는 주시어요^^;;;"

"근데 땅콩쌤, 채식해요? 전 완전 채식은 아니고 거의 채식이요, 생선 좋아해서... 라면도 좋아하고, "

단톡방에 있던 다른 분이 묻는다. 헉...

"헉... 저도 웬만하면 채소 습관이지 완전 채식한다고 말할 처지는 못됩니다. 채식한다는 말도 제가 프로필 글에 했던가요? 흑흑 찔립니다." 하고서 전에 선생님께 넘겼던 내가 쓴 소개글을 다시 보니... 한 줄이 아니라 주렁주렁이다.


아이들을 돌보며 사랑을 느끼고, 달리면서 두려움과 마주하고, 책 읽을 때 생긴 의혹이 사람들을 만나 확신에 이를 때의 기쁨. 이 모든 삶을 감정적으로 살아내고자 애쓰는 여성입니다.

마침  인스타그램 이웃이던 선생님이 내 채식 글을 보고 짧게 줄이신 것으로 보였다.


"매일 달리고, 채식을 하며 책을 읽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입니다."

이렇게 되고 싶었던 건 사실이다. 새벽에 일어나 동네 한 바퀴 돌다오고, 식구들 밥상에 개의치 말고 내 몸에 맞는 밥을 먹고, 아이가 있다면 셋 정도는 낳아서 같이 재미있게 놀 수 있는(내 어린 시절처럼) 어머니이고도 싶었다. 채식은 완벽하지 못하고, 달리기는 자꾸 띄엄띄엄 건너뛰고, 책은 읽으나 행동으로 바뀌지 않아 힘들고...


"양심의 가책이...ㅠㅠ이제부터 매일 달려보겠습니다."

민망해하는 이선생님을 달랜 뒤 아이들과 운동복을 입고 나왔다.

"헛, 핸드폰을 안 가져왔네... 그냥 달리지 말까?"

"왜? 핸드폰이 있어야 달릴 수 있어? 그냥 달리고 마음속으로 기억하면 되잖아, 뭐 어때" 딸이 말한다.

내가 또 이런다 싶어서 머리를 쿵쿵 내박았다. 달리기 기록이 꼭 남아야 하는가? 나만 달렸으면 되지, 몇 킬로보다 오늘 달렸다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나.


공원을 돌면서 가볍게 뛰면서 생각한다.

그래 오늘은 나를 위해 달리고 내일은 남을 위해 달리자. 날마다 달리는 게 쉽지 않겠지만 공원 한 바퀴라도 가볍게 도는 하루를 만들면 되지, 한 바퀴 돌 때마다 아이들이 달려와 안기고 날 놓아준다. 저 멀리서 "엄마~! 엄마 보여!" 하면서 두 아이가 손을 흔든다. 페이스에 신경 쓰지 말고 걸었다 뛰었다 하면서 풍경을 보면서 사람 없는 공원을 아무 이유 없이 달리는 거다. 오늘은 방법이나 숫자, 짐스러운 것들에 얽매이지 말고 오로지 나 편한 대로 달려보는 것이지.


그리고 내일은 핸드폰을 허리에 차고 달리기 앱도 켜고 달리자. 달리기 친구들에게 응원도 받고 오늘 나 뛰었어, 너도 지금 운동 가능해? 그럼 뛰어! 갔다 오면 어떤 기분인지 알잖아~! 파이팅을 외친다. 오늘도 달렸다고, 자주는 아니지만 이렇게 꾸준히 달리기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아이 셋이여도 마흔이 다 되어도 달릴 수 있다고, 제대로 달리는 오늘을 만든다. 내일은 쉬잖아, 어때? 하고서.


달리기를 처음 시작하던 9월 즈음에

  달리기를 한 지 4개월이 넘었다. 요즘은 사진에 찍힌 내 모습이 다 마음에 든다. 어제 이 선생님이 소개글에 같이 넣을 사진을 깔끔한 배경에 새로 찍어서 보내달라고 하셨다. 늘 앉던 책상 방 의자에 앉아 벽을 뒤에 두고 간단히 찍어서 보냈다. 바로 찍은 것 맞냐고 자연스럽게 정말 잘 나왔다고 호들갑 떨어주는 선생님 때문에 10년 전 사원증 목걸이에 끼울려고 회사 스튜디오에서 찍었던 사진을 꺼내보았다. 지금보다 10년 전, 옷매무새가 세련되고 머리 모양도 예뻤다. 물론 화장도 해서 젊고 세련된 직장인이다. 지금 사진은 머리 모양도 만지지 않고 화장도 안 하고 옷도 보통의 셔츠지만 지금이 더 마음에 든다. 서른아홉의 나는 눈이 더 깊어졌고 턱을 만지는 손길이 자연스러워졌으며 표정은 과하지 않고 부드럽게 웃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우리나라 작가 두 분 책을 꺼내서 소개글을 본다.

어린이 과학책을 주로 쓰시는 이지유 작가는 '걷기, 채식, 성평등, 냉장고 쓰지 않기 등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어요!'란 글에서 아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실천하고 있는 모습이 참 멋있다.

내 인생의 스승님 고미숙 선생님 소개글에는 대학도 과도 없다. 백수를 예찬하는 책이므로 그에 맞게 어떻게 백수가 되었는지 자신이 꿈꾸던 공동체를 꾸리고 그 방법과 과정을 나누고 싶어 하는 행동 그 자체로 내게 공부가 되고 있다. 나는 많은 지식인들에게서 작은 걸음이든 큰 걸음이든 몸의 길이 깃든 소개글을 보고 싶다. 그러면 당연히 그가 쓴 책은 내 마음을 울리고 내 행동을 바꾸는 씨앗이 된다.

 

지금 내 명함이 생긴다면 남들이 쓴 멋진 글귀보다 주렁주렁 내 욕심이 깃든 소개글보다 이선생님이 간단하게 줄인 소개글을 오늘의 나를 써넣고 싶다.

매일 달리고, 채식을 하고 있으며, 책을 읽습니다. 세 아이의 엄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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