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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Nov 23. 2020

시간 부족자가 갖는 태도

지금 나를 부지런하게 움직이게 하는 동기는 '결핍'이었다.

  내 시간이 없다는 것, 장소에 제약을 받는다는 것. 

결정적으로 내가 그 시간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은 엄청난 박탈감을 안겨준다. 그러니 아이가 태어나고 두 시간마다 젖을 물리고 재우고 울음에 반응해야 하는 시간은 '뺏기는 시간', '잃어버린 시간'이 된다. 아이를 낳은 순간부터 나는 없고 아기가 주인공이 되는 시간은 내가 선택했든 안 했든 모든 어버이들이 마주하는 현실이다. 지금 당장은 감옥처럼 답답하지만 인생 전체를 두꺼운 책 한 권에 넣었다고 생각하고 펼치면 이 시간은 몇 쪽이나 될까?


  테드 창의 소설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한 언어학자가 외계인과 교류하기 위해 외계인 언어를 배우다가 미래를 알 수 있게 되는 사고의 전환을 겪는다. 내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순차적인 설명만 가능한 현재 인류의 언어는 모든 사건을 한꺼번에 경험하는 외계인의 언어구조를 습득하면서 언어학자의 사고방식을 바꾼다. 


인류가 순차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킨데 비해, 헵타포드는 동시적인 의식 양태를 발달시켰다. 우리는 사건들을 순서대로 경험하고, 원인과 결과로 그것들 사이이 관계를 지각한다. 헵타포드는 모든 사건을 한꺼번에 경험하고,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한다. 최소화, 최대화라는 목적을.


  내게는 새롭고 엄청난 두드림이었다. 어차피 책 마지막 쪽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 인생에서 내가 쓸 수 있는 페이지는 정해져 있다. 하지만 한번 쓴 글은 다시 고쳐쓸 수가 없다. 무조건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결과를 알고 있는 드라마, 하지만 그 중간과정을 환희의 극치(최대화)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고통의 극치(최소화)로 채울 것인가, 그것만이 중요하게 된다. 사고 전환이 일어난 언어학자에게 미래의 한 장면 장면이 배송되어온다. (마치 우주에 저장돼있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자신이 낳을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 끝도 보게 된다.


  내가 막연하게 꿈꾸던 한 장면들, 기대하던 한 컷들, 또는 꿈에서 생생하게 본 이미지들은 어쩌면 내 인생 드라마를 채울 한컷일지도 모른다. 우주는 내게 미래 한컷을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는데 나는 그것들을 내 언어로 억압하고 폐기한 게 아닐까?


나는 처음부터 나의 목적지가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고, 그것에 상응하는 경로를 골랐어. 하지만 지금 나는 환희의 극치를 향해 가고 있을까, 아니면 고통의 극치를 향해가고 있을까? 내가 달성하게 될 것은 최소화일까, 아니면 최대화일까? <당신 인생의 이야기 230쪽> 테드 창


그래, 나는 8년을 어떻게 채웠나, 지금부터는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물음을 해야 한다.


지난 8년 동안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내 시간의 결핍'이었다. 그래서 둘째를 낳았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받아들여야 했던 건 '남들과 다르게 흐르는 내 시간'이었다. 내게 하루에 한 바퀴 돌던 지구가 아이에게는 하루 네 바퀴를 돈다. 그 시간에 나를 맞추는 것. 하루에 네 번씩 리셋되는 느낌. 길고 긴 하루 그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을 지각하는 일-물론 육아다-을 받아들이 는 일... 


  아이 돌보는 시간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고독한 싸움이다. 어머니 무리 몇몇이 모여 하하호호 시끌벅적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쪽이 시렸다. 그들과 내 시간이 다르게 흐름으로써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없는 내가 애처로웠다. 내 아이들에게만 소속된 게 아니라 다른 소속을 갖고 싶었다. 그게 셋째를 낳고 가장 힘든 부분이었다. 큰 애 어머니 모임에도 둘째어머니 모임에도...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다는 현실. 오로지 가족과 내가 낳은 아이들에 소속되어 내 에너지를 쏟는 일은 나 혼자 내 어깨를 주물러가며 다독이는 과정이었다.


  큰 애가 초등학교 들어갔을 때 막내는 세 살이었다. 이 아이를 날마다 유모차에 태우고 학교 앞을 드나들면서 큰애 친구 어머니들을 몇 사귀었다. 둘째가 유치원에 들어가자 마찬가지로 둘째 친구 어머니 모임을 드나들었다. 하지만 늘 막내를 끼고 다녀야 했기에 막내가 원하는 대로 일정이 바뀌었다. 모임 도중에 막내가 집에 가자고 하면 유모차를 밀고 나와야 했고 막내가 힘들어하면 집으로 들어와야 했다. 아이에게 뽀로로 유튜브를 안기기도 하고 달달한 간식으로 달래기도 했지만 이렇게까지 하면서 이 관계에 가치가 있는가?라는 물음은 항상 꼬리표를 달고 나를 쫓아다녔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가족 너머 관계에 에너지를 쏟을 만큼 내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이미 아이 셋으로도 내  RPM은 최고치였는데 외롭지 않으려고 내 에너지를 쥐어짤 때마다 몹시 피곤했다. 나는 '워킹맘'도 아니면서 아이가 셋이라 '워킹맘'처럼 바빠서 전업맘에도 낄 수 없는 엄마였다. 그러니 그들과 친구가 되지도 못하면서 얼굴만 '아는 사이'가 되어 학교 주변에서 자주 마주쳐야 했는데 그럴 때마다 뭔지 모를 박탈감을 느꼈다.


내 시간은 

1. 아이 옆에 붙어서 돌봐야 하는 시간과 

2. 아이와 한 공간에 있기만 해도 되는 시간과 

3. 아주 혼자인 시간으로 나뉜다. 


 평일에 휴가를 받은 곁님에게 막내를 맡기고 우연히 책방에 들러 강의를 듣게 되었다. 모인 사람들이 너무 좋아서 함께 공부하는 자리라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과 평일 공부모임을 덜컥 만들었다. 부랴부랴 가까운 어린이집에 막내를 오전 시간 보내기 시작했다. 평소 내가 하고 싶어 했던 고전 공부였기에 저지르고 나서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했다. 코로나로 인해 주 3회만 나가는 큰애, 둘째 등교 날짜를 모두 같은 날로 겨우겨우 바꾸고 막내도 가까운 어린이집에 오전 4시간 동안 맡기게 되었다. 


  아주 혼자인 시간이 너무 적기 때문에 나는 그 시간을 허투루 쓸 수가 없다. 지금 나를 부지런하게 움직이게 하는 동기는 '결핍'이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1시간 책을 읽고 7시부터 집안일을 시작해 8시 20분에 세 아이를 모두 등교시켜야 아홉 시부터 12시까지 내 시간을 누릴 수 있다.


  나 혼자만의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그 안에서 주어지는 하루 세 시간의 자유시간을 빛나게 해 준다. 공급이 부족하면 가격이 뛰는 것처럼 내 시간도 그렇게 값비싸 졌다. 그랬을 때 나는 어디에 시간을 쓰고 싶은가? 지난해처럼 동네 친구를 사귀는데 시간을 쓰고 싶은가, 돈으로 좋은 물건을 골라 소비하는 느데 쓰고 싶은가,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우는데 쓰고 싶은가?


  강의를 듣고, 독서모임을 하고, 글을 쓰는 시간을 3시간씩 나눠갖는다. 그곳엔 사람이 있고 내 돈을 책으로 바꿀 수 있는 시장이 있고 이야기가 있으니 재미있기까지 하다. 1석 3조다. 


  어떤 수요일-글 쓰는 날이라고 정해놓은- 책 한 권과 공책과 연필을 담아 집 앞 카페에 혼자 시간을 보내볼까 하고 나갔을 때 오히려 카페를 들어가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곳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 동석해야 할까 봐, 외톨이로 보일까 봐, 유난 떠는 것처럼 보일까 봐 쉽사리 카페를 들어서지 못했다. 

내가 나이지 못한 곳. 이 동네.

  누구의 어머니로만 존재하는 이 동네에서 혼자 앉아있는다는 것은 왜 내게 부담이 될까? 내게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그들에게 이런 시간 부족자의 형편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 괴롭다.(난 혼자 있을 시간도 부족해요,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요) 그들을 비난하는 것이 될까 봐 두렵고 내가 외계인처럼 보이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동네 친구를 만드는데 시간을 내는 것은 미루기로 했다. 아직 나를 완전히 내보일만한 충분한 시간을 주지 못할 바에야 나를 잘 알지 못해서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타인으로 남았을 때의 자유를 느끼기로 했다.


  그리하여 소속되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내려놓는다. 나를 사랑해준 사람과 그 사람과 함께 사랑으로 지은 아기 셋. 당장 내 삶의 목적은 그 아이들을 돌보는 데 있고 그 목적을 외면해버리면 모두 겉치레로 흐르게 된다. 나는 이 순간순간 시간 시간에 비싼 값을 매겨 그들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주리라. 육아는 내가 몇년간 즐거이 해내야 할 책임이지 행복의 조건도 내 존재의 목적도 아니다. 


제한된 시간 안에서도 나는 '환희의 극치'를 선택할 수 있다. 눈빛, 걸음걸이, 귀 기울이는 태도, 말투부터 매 순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인이다. 그리고 그 목적이 끝나면 미련 없이 그 사다리를 치울 수 있어야 하리라.


우리가 상상하는 질서란 그물, 아니면 사다리와 같은 것이다. 목적을 지닌 질서이지. 그러나 고기를 잡으면 그물을 버리고 높은데 이르면 사다리를 버려야 한다. 쓸모 있기는 했지만 그 자체에는 의미가 없음을 깨닫게 되니깐 말이다  -움베르트 에코 <장미의 이름> 87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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