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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Dec 06. 2020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살 수 있을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무거움을 빼고, 부담을 빼고 글을 써본다. 그래, 내 글이 진리도 아니고... 내일이면 맘이 바뀌어서 아 이건 내 진심이 아니야! 싶어도 일단은 글쓰기에 용기를 내본다. 결국 이 순간의 생각이라는 것도 이만한 에너지와 용기와 장소와 시간이 없으면 잡아둘 수 없기에.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하 '참존가'는 소설인 것 같은데 작가가 대놓고 간섭하고 훈수 두고 중간중간 제 목소리를 낸다. 특이한 전개법이다. 어렵지 않은 것 같은데 두 번째 읽으면 내용이 또 새롭고, 맨 뒷장 다 읽고 바로 첫 장으로 넘어가서 읽으면 마치 이어지는 이야기인 것처럼 새롭다. 그러니까 인간이 직선으로 나아가는 데에 익숙해 있는데 테레자의 반려견인 카레닌이 둥글게 시간과 장소를 반복하는 것처럼 소설도 그런 느낌이다.

(엇, 이거 왠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와 사고방식이 비슷하다.)


앞과 뒤가 없이 둥글어서 맨 끝을 읽고 그다음 이야기인 것처럼 맨 첫 장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사비나는 전형적인 고정관념, 일상적인 가치관, 감동적인 서사 따위에 즉 키치에 저항하는 인물로 나오는데 가장 먼저 이해가 되는 인물이었다. 반면 테레자와 토마시는 두고두고 의문을 갖고 지켜보던 인물. 마지막까지 이해 못했던 인물은 테레자였다. 그러다가 내가 깨달았다. 내가 키치를 저항하는 까닭은 약자이고 싶지 않아서이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될지언정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던 거다.


자 그 인물을 가져와서 우리 부부에 견주어 보았다.

테레자는 신분상승과 사랑을 목적으로 토마시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한다. 어떤 식으로 본다면 우리 부부와 닮았다. 테레자는 나와 곁님이 연애할 때의 곁님 그 자체였다. 그는 내게 의존했고, 나를 동경했고, 내게 맞는 사람이 되려고 내게 많은 걸 맞추었다. 나는 그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 존재 자체가 그에게 사랑이었다고 말한다면 조금 지나칠까? 마치 토마시처럼 아무것도 바꾸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심지어 토마시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랑받는 여인으로 처신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토마시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중략) 인간의 참된 선의는 아무런 힘도 지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만 순수하고 자유롭게 베풀어질 수 있다. 인류의 진정한 도덕적 실험, 가장 근본적 실험(너무 심오한 차원에 자리 잡고 있어서 우리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그것은 우리에게 운명을 통째로 내맡긴 대상과의 관계에 있다. 동물들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인간의 근본적 실패가 발생하며, 이 실패는 너무도 근본적이라 다른 모든 실패도 이로부터 비롯된다.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477쪽


그러던 관계가 내가 아이를 낳고 힘의 원리가 바뀌었다. 연애할 때 굳이 약자를 정하자면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두 사람 가운데 약자일 것이다. 약자이길 원치 않던 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그를 더 많이 '필요'로 하고 있다는 현실이 나를 짓눌렀다. 그걸 인정하지 않고서 그에게 더 달라지라고 채근했다. 나는 그가 더 많은 힘을 내주길 바랬다. 내 요구가 그에게 벅차다는 걸 알았음에도(이미 그는 나한테 맞추는 것으로도 많은 힘을 내고 있던것이라라) 아이에게 맞추지 못하는 그를 나무라고 버릴 생각까지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많은 상처를 받았으리라. 그걸 생각하니까 마음이 아프다.

지금도 그는 나를 아주 많이 사랑한다. 하지만 그건 20대 때의 아무것도 바라지 않은 '참된 선의'에서는 조금 빛이 바랬을지도 모른다.(원인을 따지자면 내가 한몫했겠지) 나도 물론 못된 생각을 했음에도 육아의 폭풍이 지나가자 그가 다시 좋아졌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음으로써 좋아하는 마음에 어떤 꼬리표도 달지 않게 되었다.


책 끄트머리에서는 테레자의 반려견 카레닌의 이야기도 나온다. 물가에 비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동물, 자신을 알아보는 인간. 그곳에서 쿤데라는 선악과를 먹기 전 낙원의 아담을 가져온다.


카레닌과 아담을 비교하다 보니 나는 낙원에서는 인간이 아직 인간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은 아직 인간의 노정에 던져지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들은 오래전부터 그 노정 속에 던져졌고 직선으로 완료되는 시간의 공백 속을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까마득한 옛날의 안개 낀 낙원에 연결하는 가느다란 밧줄이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존재한다.(중략) 낙원에 대한 향수, 그것은 인간이 인간이고 싶지 않은 욕망이다. -487쪽


   그러니까 똥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순간, '혐오'가 생기는부터가 인간의 노정이다. 동물은 똥을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키치 속에 갇혀있으면서도 우리는 키치로 가득하기 전 알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낙원을 그리워한다.

가면과 가면들을 대하면서도 우리는 상대의 실수에서 상대의 본능적인 반응에서 인간성을 발견하고 한낱 동물임을 깨닫고 반가워한다. 그러니 우리는 삶에 너무 많은 의미를 둬서(키치한 것) 무거워지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어떤 것도 짊어지지 않으려는 깃털이 되고자 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 왜?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수많은 키치로 무장한 인간들 사이에서 살아가야 하고, 죽고 나면 그들에 의해 내 삶이 한 문장의 비문으로 -키치로 남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키치와 무관하게 가벼이 살 수가 없다.


내가 곁님을 필요에 의해서만 재단하고 내가 원하는 대로 바뀌지 않음에 복수할 것을 다짐하는 대신(하하, 진짜 그랬다) 그 또한 내게 의존하던 시기가 있었던 만큼 나 또한 그에게 의존하는 것을 거울에 비추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우리도 어쩔 수 없이 힘의 논리에 따라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의 처지를 번갈아 맡겠지만 결코 우리는 남들이 정한 키치대로 움직이지 말자고 정리해본다.

거울에 비춘다는 것은 남들을 의식하는 것이 된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모습은 내가 어디에 서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각도가 조금씩 달라진다. 그러니 우리는 어디에 우리를 비출 것이 아니라 나만의 선의로, 내가 행할 수 있는 도덕적 실험을 우리 안에서 해결하면서 우리만의 서사를 만드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삶이 직선이 아니라 둥근 원을 그리며 반복한다는 것(니체는 이걸 영원회귀의 삶이라고 했던가) 그러니 우리 사이에 약자를 구분하는 것 따위가 무의미해진다. 나는 그저 그에게 믿음을 주면 된다. 당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 낙원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확신.

인간과 개 사이의 사랑은 전원적이다.
갈등이나 가슴이 메이는 장면, 진화 같은 것이 없는 것이 사랑이다.
카레닌은 토마시와 테레자 주위로 반복에 근거한 삶의 원을 그었고,
두 사람도 그에게 같은 일을 해주길 기대했다.(중략)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욕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4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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