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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Jul 04. 2021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한시간 글쓰기

  뒤늦게 <싯다르타>를 다 읽었어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인상깊게 읽었지만 뭔가 조금 아쉽다. 젊은 데미안을 폭풍 속에 놓아둔 느낌이랄까. 그랬는데 <싯다르타>는 조금 더 완결된 느낌, 그래서 안전한 느낌을 받았어요. 그 다음에 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와 <유리알 유희>읽고 싶다 느꼈네요. 유리알 유희는 20대때 겁없이 빌려왔다가 10장을 겨우 읽고 다시 반납했던 기억이 있어요. <데미안>-<싯다르타> 이런 순서로 읽었다면 그때 많은 것이 바뀌지 않았을까?     


  나는 누구인가, 나를 찾는다는 것, 구도자의 길.

‘나주책’(독서모임)을 시작할 때의 마음이에요. 이 구도자가 된 마음으로 3년을 보낸 것 같아요. 그 과정에서 겪었던 많은 감정의 폭풍들이 <싯다르타>(민음사, 1997)와 맞닿아 있더라구요. 그래서 <싯다르타>를 끝까지 읽고 싶었어요.      

  나를 찾는다는 것은 나를 잃어버렸다는 거잖아요. 왜 잃어버렸을까? 무엇이 가져갔을까? 태어날 때부터 주입된 사회 문화적인 관습, 사고방식, 가족 내에서 떠맡았던 역할들 이런것들이 나라는 존재위에 몇겹으로 덧씌워져서 나를 잃었다고 생각했어요. 앎, 배우고 나서 보였던 것들이죠. 그런데 그런 앎들을 또 쫓아가는 내가 보이더라구요. 싯다르타가 고타마를 만나고 나서 오히려 지금까지 “나는 나를 너무 두려워 하였으며 나는 나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다”고 깨달아요. 제가 늘 하는 고민이었거든요.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나’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것이냐, ‘나’를 향해 가는 것이냐....    

  

  그 후 싯다르타는 세속으로 들어가 카밀라를 만나고 중년이 될 때까지 욕망에 이끌린 삶을 살아요. 그리고 그런 자신을 돌아보고 모든 걸 버린 채 뱃사공이 된단 말이에요. 거기서 아들을 만나게 되면서 이해할 수 없던 아버지의 감정까지 이해하게 되요. 강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데 그 소리가 한가지가 아니라 여러가지 그 다양함이 모여서 단 하나의 말로 이루어진 “완성이라는 의미의 옴”이라는 깨달음을 얻어요. 그리고 그것은 말로 나오는 순간 참뜻을 훼손시키기 때문에 절대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친구 고빈다에게 얘기하죠. 이 200페이지 안에 저는 그동안 ‘나주책’하면서 고민한 모든 질문이 들어있어서 놀랐어요.  

    

  글쓰기를 배우고 나서 익숙한 감정이 아닌 감정이 치고 들어올 때 이게 무엇이고 왜 생겼는가를 생각하면서 글을 쓰는 버릇이 생겼어요. 물론 답을 찾을 때도 있고 쓰다가 포기하는 경우도 있지만 좋은 진전인거죠.    

  

며칠 전에 큰언니가 제 인스타계정를 갑자기 팔로우했어요. 보니까 팔로워도 가족들 뿐이고 가입만 해놓고 안하고 있더라구요. 그 사실을 안 순간부터 불안해지고 안절부절 못하다가 결국 인스타 계정을 비공개로 바꾸고 가족들을 모두 그 선 바깥으로 밀어냈어요. 그들은 내가 ‘나’를 찾아가기 바라기보다 변하지 않고 예전의 ‘나’로 있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에요. 내게 역할을 준 사람이고 끊임없이 나를 평가하고 판단하고(사랑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도움을 주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들이에요. 싯다르타가 마지막에 친구인 고빈다에게 이런 말을 하잖아요.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은 아마도 이 가르침이라는 것, 바로 그 무수한 말들이 아닐까 싶어.

저는 아버지의, 오빠의, 언니들의 가르침으로 만들어진 사람이에요.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그들 목소리를 차단해야 하거든요. 그러기 위해선 내 삶의 정보를 주기 싫다는 방어벽이 작동한거에요.  


사실 그들 덕분에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안락했어요. 그들이 갔던 길로 그들의 우산을 나눠 쓰면서 살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스무 살에 혼자 생전 처음 살아보는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는데 너무 무섭잖아요. 모든 걸 혼자 해야 하니까. 전화 걸어서 시간 잡고, 지도 보고 찾아가서 면접 보고, 그러면서 사기도 당하고... 아무리 많은 조언을 들어도 두려움은 내가 이겨내야 하잖아요. 그렇게 혼자 자취도 하고, 대학도 가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직장도 골라가면서 독립했다고 생각했어요. 결혼을 할려고 하니까 이게 또 가족들이 달라 붙는거에요. 자신들은 미리 해봤으니까, 아이 키우는 것도 그렇구요. 네가 일을 관둬라, 아이를 하나 더 낳아라... 정작 진짜 궁금한 것들을 물을수도 그들이 답을 줄 수 도 없어요. 정신 차리고 다른 도시로 이사를 왔어요. 기분이 나쁠 때마다 글을 썼거든요. 벗어나고 싶어서. 그런데 내가 끊임없이 아빠나 언니들 같은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는거에요. 내가 그렇게 만든 건 아닐까? 익숙한 것을 자꾸 끌어당기는 것일까? 글을 쓰면서 그런 윤곽들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책을 읽었으니 윤쌤한테 배운대로 서평처럼 써야겠다 하고 글을 쓸려고 하면 또 그게 안써져요. 헤르만 헤세는 워낙 유명해서 작가소개도 필요 없고, 더군다나 내면에 대한 이야기의 주제를 어떻게 잡는게 나을까... 이생각 저생각 하다가 졸리게 되요. 그래도 기록해놓고 싶은데, <데미안>도 그러다 놓쳤는데...


그러다가 나주책 패들렛에 글 올리듯이 멤버들한테 말하듯이 써보자 했더니 마음속 말이 나와요. 구술성이 가진 힘이라고 할까. 신기하더라구요.  그 책이 왜 나한테 좋은지 알려면 내 이야기를 안할 수 없잖아요. 말이라는 건 규칙대로 나오는게 아니니까. 그래서 오늘 이렇게 한 시간 글을 썼어요.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어서 술술 써진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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