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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Aug 22. 2021

'인간실격'되지 않으려는 몸부림

너 자신의 끔찍함, 기괴함, 악랄함, 능청맞음, 요괴성을 알아라!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민음사,2004)은 위선적인 인간들 사이에서 적응하지 못하면서도 세상을 이해해보려고 애썼던 한 남자가 결국 믿었던 사람들에게 ‘인간실격’처리 되버리고 말았던 과정을 수기 형식을 빌려 쓴 글이다. 주인공 요조는 인간 위선에 대한 이해할 수 없음, 난해함, 인간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다. 인간 부적응자임을 자처하며 그런 자신을 들키는 것을 끔찍이 싫어하는데, 그것을 감수하고 들키고 말아야 진짜 친구가 되는 관계의 아이러니또한 요조는 모르고 있지 않다. 상처받기 싫어하는 감수성은 요조 뿐 아니라 모든 인간 내면의 공통점 아닌가? 현대인으로 살아내지 못하고 그 경계선 바깥을 그리워하는 필자도 마찬가지다.

(p.77) “간단하게 말해주었더라면 쉽게 끝날 일이었던 것을 나중에 알고 넙치의 불필요한 경계심, 아니, 이 세상 사람들의 불가사의한 허영과 체면차리기에 말할 수 없이 암울해졌습니다.”     


가난에 대한 공포심, 나라는 사람의 밑바닥, 별볼일 없이 연약한 우리의 내면은 다자이의 소설로 위로를 받는다.

이슬아 작가가 <말하는 몸1>(문학동네,2021)에서 누드모델을 하며 모두의 몸이 각각 다르게 초라하다는 걸 깨달으며 얻은 위안과 <인간실격>에서 독자가 받는 위안의 결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사실 제각각 초라한 인간인데, 개인들에게 ‘인간실격’당하지 않기위해 고투하고 있지 않은가?      


상처받기 싫어서 익살꾼이 되어 쓸데없는 기교를 부리고, 눈치를 살피고, 상대방의 저의를 파악하느라 진땀을 빼면서도 그런 나를 들키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현대인. 이 시대가 촉구하는 처세술, 인간관계, 사람의 도리, 예의 체면 치레같은 것을 내면에 꾸역꾸역 우겨 넣다보면 ‘진심’을 잃어버리고 만다.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거나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자아를 잃어버리게 되고 곧 무력감과 우울감이 밀려온다. 현대인의 고질병이다.      


독자들은 수기 후반으로 갈수록 죽고 싶어하며 삶의 의지를 다지지 않는 요조를 몰이해하거나 넙치와 호키를 경멸하는 요조가 기괴해 보일 수도 있다. 요조의 주변 인물인 ‘넙치’와 ‘호리키’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우리 주변사람이나 나 자신이기에 익숙하고 요조는 불편하다. 그렇다고 과연 인간이 아니라고 우리 맘대로 실격시킬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요조’들이 실격처리 되어 정신병원이나 기타수용소에 감금되었을까? 죽음에 대한 의지가 삶에 대한 의지보다 강했던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창비,2007)의 영혜가 떠오른다.  

   

‘너 자신의 끔찍함, 기괴함, 악랄함, 능청맞음, 요괴성(p.92)’을 매순간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런 개인들로 이루어진 지금 세상을 요조처럼 공포스럽고 난해하게 느끼지 못하는 것을 더 경계해야한다. 문학이 하고 있는 역할이 그것이다. 끔찍함에 익숙해지지 않기. 그런면에서 <인간 실격>은 익숙한 개인들을 요조의 시선으로 낯설게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들을 바라보며 무의식적으로 판단해버린 나의 편리함과 다자이의 고뇌가 부딪히며 불편하게 멈춰서는 시간, 그 시간이야 말로 문학이 당신에게 말을 거는 떼다. 당신의 감수성, ‘진심’이 깨어나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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