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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Aug 27. 2021

쉬웠던 시는 있었지만 쉬웠던 시집은 한번도 없다.

박연준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황인찬, 박준, 허연, 허수경, 유진목에 이어 박연준의 시집을 이야기하는 시간. 

시모임은 벌써 4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전 칼럼을 필사해 마지않던 산문집 <밤이 선생이다>에서 황현산의 한마디가 나를 시모임으로 이끌었다. 2003년에 게재된 칼럼을 17년이 지난 뒤에야 읽었고 예언처럼 그 마당들을 목격하고 있었으니 망설일 틈이 없었다.

(p.196)"나는 여성들의 문화적 역량이 창조적으로 발휘되고, 억압된 방식으로 뭉쳐진 열정들이 제 길을 찾을 수 있는 또다른 문화의 마당이 마련되어 한다고 생각한다. 문화센터에서 문학 창작법을 배우려고 힘을 낭비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보들레르의 시를 연구하거나 이윤기의 소설을 분석하는 주부들의 모임같은 것이 여기저기서 결성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그런 일에 권위자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다. 제도문화의 사회적 확산은 사실을 모르는 이름들의 힘이 아니라 사실을 끌어안고 있는 익명들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마침내 그 때가 되었다." (2003) -황현산 <밤이 선생이다>(난다,2013)

그렇게 덜컥 시를 좋아하는 책방지기에게 시모임을 만들어보자고 했고 그것의 놀라운 힘을 매 시집마다 느끼고 있다


시를 이야기하는 모임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라는 마음으로 시작한다.  '함께 알아가볼까'라는 에너지 이미 읽었던 시들인데 거기서 새로운 무엇인가를 길어 올린다. 아주 신기한 경험이다. 아무것도 모른채로 일독, 이 시인에 대한 이야기, 인터뷰를 찾아보며 이독, 함께 모여 낭송하면서 삼독. 사람을 알아간다는 것, 관계를 만들어간다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조심 조심 천천히 들여다보면서 이해하려 애쓰는 마음과 입밖으로 그 사람이 했던 생각을 되새김해보면서 공감하다 보면 간과 인간을 서로 잇고 있던 가느다란 끈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함께 읽은 시집은 단 한권도 쉬운 적이 없었다. 모든 시집을 붙잡고 처음엔 너무 어렵다고 징징대다가 모임끝에는 이 시집 너무 좋다며 박수를 치며 마친다. 이런 경험이 새 시집을 읽고 모일때마다 반복되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의 힘을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



 박연준 시인이 YES24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어떤 균열, 틈, 메울 수 없는 허기 같은 걸 수시로 느끼는 데
그걸 표현하기엔 '시'라는 장르가 알맞죠.
시를 쓰고 나면 그 불안이 가라앉아요.
메꿔지지 않는데 고요해지는 거죠.

나는 이제 시에서 의미 찾기, 메꾸려고 하지 않는 방법을 조금 씩 배운다.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란 것이 논리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늘 어떤 서사가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 이유없이 감정이 일어나기도 하지 않던가? 그저 그 상황을 그대로 잘 표현한 시인의 한 '순간'에 단단하게 연결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시로 인해 고요해지며 마음을 쓰다듬을 뿐이다.


모든 시를 알 시간이 충분치 않더라도 박연준 시인이 전달하고픈 그 시간의 '감각' 그것을 느끼기 시작하면 우리는 시인이 서있는 곳으로 곧장 들어간다. 이번에 내가 들어간 순간은 겨울, 사람들이 지나가는 길. 거기에 서서 겨울 나무의 살결에 끼여 찬바람을 맞아내는, 꼼짝 못하는 나무가 되버린 시인을 감각한다.



겨울의 고도

- 박연준


빨간 코트가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

얼굴 위로 자꾸만 음영이 드리워지는데

나를 덮은 우주의 그림자가

나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겨울의 갈라진 살결, 그 가느다란 틈에

나는 끼워져 있다


앙상한 얼굴의 낯선 사내가

가끔 주먹으로 두드려보는

나는 겨울이 앓는 문등병,

눈썹이 빠지고 코가 주저앉은 채로 휘파람 분다


애인은 내내 화두였다

전화는 오래도록 먹통이었고

바람이 유난히 보채는 날에는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 여자들 오목한 허리선에 베이고 싶었다


입 열면 허연 입김

겨울에 피어나는 그을음처럼, 아득히 퍼지고

나는 겨울의 고도를 생각하며

자주 떨었다



'자신에게 드리워진 음영의 그림자'가 다른 '나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으면'하는 시인의 따뜻함, 애인의 연락은 먹통인채 바람부는 날에도, 거리의 젊은 여자들에게 머무르는 또다른 감정. 추워야 생기는 입김과 너무 뜨거워서 생긴 그을음의 온도차이를 느끼며 <겨울의 고도>를 썼을 시인이 그 겨울날이 느껴져서 나도 함께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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