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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Sep 10. 2021

마법놀이, 상형문자책이라고 아이가 꺼내온 <악의 꽃>

내 책장에 있는 정보에 의하면 책상에 앉아 머리만 쓰는 사람의 건강을 본격적으로 염려한 사람은 루소의 주치의 였던 사뮈엘오귀트스 티소다. 18세기부터 시작된 공부병의 사례가운데 나처럼 마흔이 되어 늦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에 대한 염려또한 빠지지않고 등장한다. 요즘 책상앞에 오래 붙어있는 나를 보고 둘째가 말한다.

"엄마는 밥할때, 간식낼 때, 화장실 갈때, 잠자러 올때가 아니면 이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 같아. 도대체 나랑은 언제 누워있을거야? 나랑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누워서 얘기나 하며 놀자. 응?"


내 건강을 염려하는 티소의 책을 탁 덮고 일어난다. 통진두레문화센터 앞에서 얻어온 LED등불을 가지고 마법놀이를 하기로 한다. 괴상한 주문을 외우고 베란다 식물들 잎파리를 주워오라며 시키면서 불꺼놓고 노는거다.


주문을 외우기 위해서 상형문자가 써있는 마법책이 필요해.

그래? 숲(책장)에서 상형문자가 들어간 종이조각을 주워오너라!

열의가 가득찼던 둘째가 내 책장에서 표지에 프랑스어로 쓰여있는 보들레르의 <악의꽃> 시집을 가져왔다. 오 그럴듯해. 마법은 그래, 모르는 언어에서 시작할지도. 목차에서 아무 제목이나 고르라고 한 다음 그 쪽을 펴고 주문처럼 낭송했다. 아이들의 손이 노란 횃불 아래서 빛난다.


<살아있는 횃불>


-샤를 보들레르


빛으로 가득한 그 들이 내 앞을 행진하네.

고귀한 천사의 자력에 끌리듯

내 형제들, 거룩한 형제들이 행진을 하네

내 눈 속에 다이아몬드의 불빛을 흔들면


온갖 함정과 중제에서 날 구원하고

그들은 아름다움의 길로 나를 인도하네,

그들이 내 하인이듯 나는 그들의 노예이니

내 존재는 온전히 이 살아 있는 횃불을 따른다네


매혹의 들이여, 신비한 빛으로 반짝이도다,

한낮에 타오르는 촛불처럼

붉은 태양도 이 환상의 불꽃을 당할 수 없도다


횃불은 죽음의 찬미, 그대는 부활을 찬양하니

내 영혼의 부활을 노래하며 그대는 행진하

태양조차 별들의 그 불꽃을 수그리지 못하리라



출처 : <악의꽃> (김인환 옮김, 문예출판사)


자못 진지해진 세 꼬마들이 등불을 횃불처럼 들고 거실을 행진한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파리 개선문이 눈앞에 나타난다. 보들레르의 시가 빛나기 시작한다.


프랑스 대혁명, 쿠데타, 7월혁명, 2월혁명끝에 또다시 제 2제정. 나폴레옹 3세의 파리 재개발로 거리가 바뀌어가고 아름다움으로 번쩍임과 동시에 혁명의 물결이 일렁이던 파리. 태양조차 수그러뜨리지 못하는 별들의 불꽃들. 보들레르는 혁명의 횃불을 본 것일까, 세계 최초의 도시를 밝힌 불빛을 본 것일까? 아마도 둘 다겠지. 발자크가 그려놓은 <나귀가족>의 음울한 파리를 겨우 겨우 거슬러올라가 19세기 중반에 도달해 콩스탕텡 기스의 작품이 떠돌아다니는 화려한 파리를 더듬더듬 상상해본다.


아이들은 자신의 등불의 이름을 지었더랬다. 딸아이는 별등, 둘째는 등불, 셋째는 은하수. 너무 밝아서 잠이 들지 못했는 나는 횃불들을 거실 창가로 내어놓았다. 태양열로 충전히 되는 이 LED램프는 스위치가 없다. 태양을 감지하면 자동으로 점멸되었다가 저녁이면 불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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