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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Sep 14. 2021

선사시대 동굴벽화, 무엇이 미술일까?

<곰브리치 미술사> 함께읽기 모임 2회차


원시인을 미개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들이 문명이전시대에 살았다고 해서 미개하다고 할 순 없다고 곰브리치는 말한다. 그들은 그들 나름의 관습과 의식을 바탕으로 미술을 했다

곰브리치가 개정판이 나올 때마다 추가해놓은 여러개의 서문들과 고대미술에 들어가기전 20쪽에 달하는 서론을 꼼꼼히 함께 읽어본다.


서론에서 그는 비슷한 소재를 그린 두 작품이나 한 화가가 다르게 표현한 두 데생, 같은 시대 같은 주제라도 화가나 작업방식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미술작품들을 나란히 보여준다. 이같은 비교로 곰브리치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름다움의 진실은 또한 표현의 진실과 같다'는 것. 좀 더 풀어보자면 아름답다는 건 표현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 표현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가질 수 있다는 말 아닐까? 그래서 우리가 표현하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하는 것을 찾아낸 화가의 작품을 통해 깨닫고 "그들의 세계를 한번 힐끗 내다보기로 한다면"(p.29) 우리가 이해못하는 아름다움은 없을 것이다. '아름다움의 진실'을 볼 수 있는 시선이 내게 생긴다면 타자에게 붙들려 이끌려가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스 라스코 동굴 천장에 그려진 동물들, 기원전 15,000-10,000년경.

이제 다시 긴 서론을 지나 1장, 선사시대로 가볼까? 인류가 아주 오래전부터 동굴에 벽화를 그렸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왜 이런 그림을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그렸을까? 겨우 1만 5천년 전 우리와 같은 인간종이 그린 그림이다.


어릴 때 우리집에 카메라가 처음 생겼을때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강아지 사진을 찍으면 강아지 혼이 그 사진에 갇혀서 실제 강아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냥 쥐약을 주워먹고 죽었는데도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생각. 아마 원시시대에 그림은 이렇게 실제와 연관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그리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벽화는 미신, 일종의 샤머니즘, 토템일까?


나는 1만년전 동굴 속 소 벽화 앞에 서 본다. 강아지사진을 찍었던 불안감으로 날카로운 사냥 무기를 들고 그 앞에서 요란한 사냥 행위를 엄숙하게 해낸다. 그 행위로 벽화안에 물소를 가둬놨다는 나만의 의식. 혹은 부족의 의식. 사냥에 실패할거란 불안감이 줄어든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우리는 물소 사냥에 성공한다. 불가능한 상상이 결코 아니다. 우리의 제사, 기우제, 사당같은 것과 비슷한 관습인 것이다. 그들의 벽화는 결코 실용적이지도 않고, 장식이나 미를 위해서도 아니다. 주술적 힘에 대한 표현, 즉 '착상'이자 '상징'의 결과물인 것이다. "왜냐하면 미술의 모든 역사는 기술적인 숙련에 관한 진보의 이야기가 아니라 변화하는 생각과 요구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p.44


선사시대에 남겨진 것이 즐거움이나 '장식'으로 만들어진게 아니라고 해서 미술이 아닌 건 아니다. 그들이 전달하고 표현하려던 관념이나 작품의도가 있으면 '미술'인 것이다. 이 형상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고 이는 곧 기호, 언어로서의 역할을 하는 셈이니 고대의 벽화는 미술이었다. 스스로 설명되지 못했던 '미술'에 대한 정의가 고대 벽화'에 대한 곰브리치 설명을 듣고나서 또렷해지기 시작한다.


곰브리치미술사 낭독모임 2회_서론과 1장, 선사 및 원시 부족들 :고대 아메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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