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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Sep 24. 2021

덕분에 무연히 울 수 있게 되었다, 이제니 시집

시시한 모임 9월의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지금까지 만난 시들과는 완전히 다른 결의 시집을 만났다. 새로운 것은 나이가 들수록 반갑지 않은 걸까? 읽다가 처음엔 곧잘 졸았다. 시는 눈이 아니라 입으로, 소리로 나오면 다르다고 했어. 꿋꿋이 여백이 없는 시를 읊어본다.


시인 이제니는 스무 살 때부터 소설을 써왔다. 서른 여덟살이 되던 2008년. 모아놓은 시를 신춘문예 공모전에 냈던 것이 당선되면서 등단했다. 그녀의 시는 그래서 소설의 한부분을 뚝 떼어온 것처럼 네모나다.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 (문학과지성사, 2020)을 펼쳐보니 어디서 쉬어야 할지 모르는 낱말들이 빼곡하게 들어차있다.   

 

"우리가 전형적인 시라고 할 때 낱말마다 의미가 있다고 설명하지만 나는 각각의 낱말에 꼭 의미를 둬야할까...의미 이전에, 의미를 넘어 낱말에 새롭게 발생하는 에너지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제 시집에 실린 첫 시부터 마지막 시까지 줄줄 읽어 내려가면서 어떤 리듬을 느끼게 된다면...시라는 것이 의미 이전에 문자로 된 리듬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 <경남신문> 2013년 인터뷰에서  

 

시집을 같이 읽기 시작하며 의미찾기, 맥락살피기를 많이 떨쳐냈다고 생각했는데 사람의 언어작동 프로세스가 쉽게 바뀌지 않더라. 그래 '리듬'. 그 행간에서 느껴지는 파동, 거기에 내 목소리를 싣고 시인의 의식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시인 박연준은 그의 산문집 <쓰는 기분>에서 '시가 어렵다면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세요"라고 조언한다. 새는 그저 날개짓을 해서 날아오를 뿐이다. 이제니는 새가 어디를 향하는지 그 새가 어떤 형상인지보다 그 새의 날개짓, 어제와 다른 어떤 움직임. 리듬을 쓴다. 어려울 것 없다고 나를 독려한다. <구름에서 영원까지>를 소리내어 읽는다.  

 

(p.14) "(중략) 돌의 심장에 귀를 기울였다. 말은 들려오지 않았다.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시간의 저편에서 날아오는 것. 시간의 저편으로 달아나는 것. 멀리서 오는 것은 슬픔이다.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언젠가 네가 주었던 검은 조약돌. 바다는 오늘도 자리에 없었다. 물결이 너를 데려갔다. 어둠이 너를 몰고 갔다. 휘파람을 불면 바람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너의 이름은 나와 돌 사이에 있었다. 나의 이름은 너와 물 사이에 있었다. 구름은 물과 돌 사이에 있었다. 돌의 마음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었다. 주머니 속에서 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결은 왔다가 갔다. 울음은 갔다가왔다." /(중략)  

 

상실, 슬픔, 그 모든것이 눈 앞에서 펼쳐지며 물이 되어 흐른다. 한 단어로 축약할 수 없는 울음이 보이기 시작한다. 어떤 것들은 의식 그대로, 줄이지 않고 날 것 그대로 드러나야 만져지는 감각들이 있다. 이제니의 시들은 반복되는 문장과 어감을 통해 의식속으로 침잠해 들어갈 수 있게 해준다. 짧게 줄일 수 는 내면도 있지 않을까? 겹겹히 가면을 덧씌워 숨어버린 나를 찾기 위한 여행. 그런 찰나의 날개짓에 동행하길 바라며 시인은 자신과 자신이 아닌 목소리를 넣어가며 말을 건다. 상반된 생각들, 양면적인 감정, 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의식들이 그녀가 쓴 리듬으로 위로받는다.  

 

/(p.59) "접어둔 꿈을 펼친다. 거리는 거리로 이어지고 집은 집으로 이어져. 첫번째 집은 문이 없었고. 쉽게 다음으로 건너뛰지 못하는 미련한 마음이 다음 집과 다음 집도 첫번째 집으로 오인하도록 하였기에. 결국 네가 찾고 있는 것은 열리지 않는 문이라는 듯이 너는 너 자신을 속였으나(중략) 결국 네가 찾고 있는 것은 문이 없는 집이라는 사실을 너 스스로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중략)그렇게 바깥으로 향하는 공간으로 뛰어들기를 반복하여서 다시금 어제의 밤은 몰려왔고. 그러면 이제 무언가를 붙잡아야만 한다고. 그러면 이제 어딘가에 도착해야만 한다고. 그러나.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 들여다보듯이.(중략) 그 어렴풋한 그림자야말로 네가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아니. 네가 잊을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잊어버려서는 안되는 것을 잊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시간을 떠올렸고.(중략) - <거울을 통해 어렴풋이>중에서

 

시인의 시는 지금까지 어떤 시들보다 쉬운 입말로 되어있다. 상징도 함축도 지명도 없이 건들어지는 감정의 리듬을 타고 그 안으로 꿋꿋히 들어가서 어떤것을 건져올리기도 하고 지켜보기도 한다. 이 시를 골라서 낭송했던 선생님은 이제니의 시들은 '보편성'을 획득했기에 많은이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했다. 시인의 프로필을 확인하지 않고 읽었던 그 시들에는 나이도 국적도 특정 젠더의식도 느껴지지 않았다. 바람처럼 날아가버릴 수 있는 사유를 붙잡아 받아적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번에 만난 시집에게도 열광한다. 그러므로 시는 어디에나 있다. 발견되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인간도 마찬가지. 시인이 겹겹의 자신을 우리에게 흔쾌히 나눠주었기에 꽁꽁 숨어버린 내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쓰다듬어 줄 수 있었다.

 

이제니의 시들을 받아들이고 동행하게 된 우리는 시집의 맨 마지막장에 쓰인 <시인의 말>을 다시 읽는다. 해설도 비평도 필요하지 않은 시집. '시인의 말'을 되뇌이며 이제 나도 깊은 밤 혼자 무연히 울 수 있게 되었다.  

 

<시인의 말>

- 전문 -

 

이제 나는

손을 하나 그리고

손을 하나 지우고  

 

이제 나는

눈을 하나 그리고

눈을 하나 지울 수 있게 되었다.

 

지웠다고 하나 없는 것도 아니어서

미웠다고 하나 사랑하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이제 나는 깊은 밤 혼자 무연히 울 수 있게 되었는데

나를 울게 하는 것은 누구의 얼굴도 아니다.

 

오로지 달빛

다시 태어나는 빛

 

그것이 오래오래 거기 있었다.

 

발견해주기만을 기다리면서

홀로 오래오래 거기 있었다.  

 

2019년 1월

이제니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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