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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땅콩 Feb 04. 2022

올리버를 통해서 마주한 19세기 런던의 민낯

찰스디킨스 <올리버 트위스트> 1839년 영국문학

다시 영국입니다. 이시기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로, 세계최고의 국가의 위상을 떨치던 대영제국의 시대입니다. 역사가들이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을 말한다면 찰스 디킨스는 당시의 빈민가와 하층민의 삶을 소설에 담아 영국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올리버 트위스트>(현대지성,2020)이야기는 구빈원에서 시작합니다. 산업도시에 넘쳐나는 빈민들을 구제할 목적으로 고아부터 부랑자까지 수용하는 당시의 사회시설인데요. 온갖 폭력과 비리가 난무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올리버라는 아이가 거기서 태어나고 10살이 되자마자 쫓겨나다시피 해서 런던 빈민가로 내몰립니다. 아동착취로 유명한 페이긴 패거리들에게 걸려들어 온작 풍파를 거쳐 출생의 비밀을 알아내고 빈민가를 벗어난다는 것이 줄거리입니다. 


저는 올리버에게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는 두 여성, 로즈와 낸시에게 감정이입이 많이 됐습니다. 로즈는 가족의 불행으로 가문이 망한후 친척의 도움을 받아 하층민 신세를 면하지만 낸시는 어릴때부터 빈민가에서 몸을 팔며 어른이 됩니다. 폭력적인 사익스에 길들여진 낸시가 그 두려움을 뚫고 올리버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공동체를 배반하기란 쉽지 않았을 겁니다. 올리버때문에 낸시의 삶을 알게된 로즈는 그녀에게 밝은 미래를 약속하며 빈민가에서 탈출을 제안하지만 낸시는 다시 사익스에게 돌아가 살해되고 맙니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인상깊었던 것은 낸시라는 하층민여성의 딜레마를 잘 담아낸 것입니다. 발자크의 <나귀가죽>이나 스탕달의 <적과 흑>에 나오는 여성들에 대해서는 공감을 못했던게 사실입니다. 가난과 절대사랑의 상징 폴린, 부와 계급의 상징 페도라, 어머니같은 사랑 레날부인과 허영과 자극만을 쫒는 마틸드. 네 여성은 환상같았어요. 작가속에만 있는 혹은 그 당시 사람들의...또는 남성위주의 시대속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허공에 붕떠서 상징으로만 존재하는 환상같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네 여성이 상류층 여성이었기에(폴린은 나중에 상류사회로 편입된다) 더 그렇겠지요. 


영화화된 <올리버 트위스트>(2005)에서의 올리버와 낸시

진정 땅을 딛고 있는 여성은 낸시 한 사람뿐이었다 말하고 싶어요. 아, 수다쟁이 내사랑 에마도 있었죠!  하지만 에마는 자신이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꿀수 있다고 오만해합니다. 그 주변에서 가장 약자였던 제인페어팩스를 이해할 용기조차 못냈던 사람이예요. 어쩌면 그것이 계급 여성의 한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조차도 모르고 관습과 계급의식에 얽매여 있는 우리처럼요. 


고아에다 어려서 최약자였던 올리버를 다시 악당소굴로 데리고 온것도 낸시고 다시 구해낸것도 낸시인걸 보면 약자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가장 가까이 있는 같은 약자입니다. 우리끼리 서로 연대해야 상류층의 선의도 빛을 발하죠. 찰스디킨스는 법과 제도, 상류계급의 도움의 손길에도 다시 악당들 패거리로 끌려들어가는 올리버를 통해 제도의 한계, 정부의 무능력에 좌절하면서도 개인에게 희망을 걸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려면 실업과 빈곤을 무능력하고 혐오스럽게 바라보는 인식을 바꾸는 것이 먼저겠지요.


어떤 분이 낸시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내면서 낸시가 로즈의 손을 잡지 않은 것은 사익스에 대한 '사랑'때문이 아니었을까?로 짐작을 하시더라구요. 사익스에 대한 '사랑'때문인 것도 맞지만 정확하게는 제대로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의 인생경험이 발목을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낸시를 늘 받아주었던 곳은 페이긴이 꾸린 공동체였고 사익스의 옆자리뿐이었던 '경험의 한계'. 낸시는 아직 물들지 않은 올리버를 보면서 되돌릴 수 없는 자신의 과거를 보았을테고 어른으로서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를 냈다고 봅니다. 아니 목숨과 맞바꾼 용기죠.


마찬가지로 찰스디킨스가 어른여성이자 세 아이의 어머니인 제게 전하려고 했던 메세지도 또렷해집니다. 내가 줄 수 있는 최대치의 사랑, 아이들이 사회에서 받았던 호혜의 경험, 그 경험만이 불행에 빠졌을 때 개인에게 공동체에 적극적인 구조요청을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불행에 빠진 이웃을 모른체 하지 않고 손을 내밀수 있는 용기를 내는 어른으로 자라나겠지요? 당시의 런던에서 200여년이 흘렀지만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이 참 멀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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